내일을 내다보는 원칙주의자,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1945년 해방둥이의 삶은 한국 현대사를 가로지르면서 출발한다. 그들의 삶은 시작부터 곡절을 예고하고,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견디고, 1960년대의 가난과 벗하면서 진행됐다. 그들이 사회인으로 첫발을 떼었을 때 한국사회는 여전히 안정되지 못한 구성체였다.
서희건설 이봉관 회장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일은 드물게 흥미로운 경험에 속한다. 건설업계의 원로가 걸어온 오랜 곡절의 삶이 흥미로움에 넓이와 깊이를 더하기도 하지만, 그에게서 듣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의 출발점은 아무래도 그가 1945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3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봉관 회장은 1946년 가족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아버지는 조모를 모시러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월남하지 못했다. 철이 들기 전이던 유년시절은 그에게 고된 세상살이의 고됨을 알리는 첫 관문이었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모시며 농사일을 하면서 생활고를 견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에는 선교사 장학금으로 생활고를 극복하면서 배움의 길을 걸었다. 고아들만 받아 주는 미션스쿨에서 맹인 학생의 도우미 역할을 하며 교회 주일학교 교사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학업을 계속했다.
경주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지속적인 가난 탓에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하며 경의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 포스코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운송업체를 설립하며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1994년 업종을 건설업으로 바꾸면서 사명을 (주)서희건설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렀다. 서희건설은 창업 20년만에 매출 1조원, 시공 능력 30위에 이르는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원로 기업인 이봉관 회장을 만나 1945년 이후 그의 삶, 그리고 그의 삶이 이룬 ‘서희건설’의 현황에 대해 들었다. 첫 이야기는 그가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딘 1970년부터 시작했다.
Q. 1970년 포항제철 공채 2기로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입사 당시를 회고할 때 기억에 남는 일화를 듣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하려 합니다.
1970년은 포항제철이 창립된 지 3년째 되는 해였습니다. 그 해 3월 입사한 공채 2기생들은 1969년 9월에 입사시험을 치르고 10월에 합격자 발표를 들었어요. 당시 포스코 본사는 서울 명동 YWCA 회관에 입주해 있었는데 11월부터 소집되어 매일 1시간씩 강의실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았어요. 수강생들에게 매월 1만 2000원씩 현금을 지급했지요. 당시로서는 제법 큰 액수였습니다. 친구들과 술자리 몇 번 할 수 있는 돈이었어요. 교육지원금일 수도 있었고, 갓 대학을 졸업하고 주머니 사정이 빠듯한 입사 대기자들에게 입사 전까지 쓰라고 준 용돈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쨌든 공짜 교육에 용돈까지 받았으니 횡재한 기분이었어요.
Q. 포항제철에 입사하기를 잘 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이신가요?(웃음)
사실입니다.(웃음) 당시 포항제철 신입사원 봉급이 3만 1000원 수준이었는데, 입사 전 예비교육을 받고 있는 합격자들에게 1만 2000원의 돈을 준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지요. 사실 돈보다 그때 4개월 동안 배운 일본어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운송부로 갔을 때 일본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하는 사람이 저 혼자였어요. 제가 그래도 언어 습득에 소질이 있는 편이었는지 일어를 꽤 잘했습니다.
언어는 기초를 배우고 나서 실무에서 제대로 익히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조금 서툴러도 움츠러들지 않고 적당히 빠른 속도로 반복하면 잘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고, 그러면 차차 익숙해집니다. 그때 저보고 일본에서 몇 년 동안 있었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1만 2000원을 받아 들고 매우 흐뭇했는데, 다음 달에는 2000원을 떼고 1만 원만 주는 거예요. 교육에 4~5일 빠졌으므로 결강 페널티가 2000원이라는 겁니다. 그게 얼마나 아까웠는지 다음 달부터는 절대 교육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매주 주말에는 시험이 있었어요. 나는 흔히들 말하는 일류대 출신이 아니므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하고 시험을 치든 말든 크게 개의치 않았어요. 그런데 서울대 출신들이 시험 절대 반대를 외치고 나섰어요. 거의 시위하는 수준이었지요. 나이 지긋한 일본어 강사는 하는 수 없이 교과서를 펼쳐 놓고 답을 써도 좋다고 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전원 만점 수준, 전원 성적 평준화였지요. 만약 그때 일본어 강사가 엄격하게 가르치고 엄격하게 시험 관리를 했다면 수강생들의 일본어 실력이 더 많이 향상 됐을 겁니다.
Q. 포항제철, 지금의 포스코는 2018년 현재 시가총액 5위, 자산규모만 약 69조 8000억 원에 이르는,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게 전문경영인이 운영하는 대기업 집단입니다. 하지만 2000년 민영화 이후로도 조직, 또는 기업문화는 여전히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수평보다 수직적이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1970년대 포항제철에서 생활한 직장인들의 일상 경험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회장님 경험을 듣고 싶습니다.
제가 1970년 처음 발령받은 부서가 포항 총무부 총무과였어요. 당시 총무부에는 인사과와 총무부가 있었는데, 총무과에는 이름 그대로 어느 부서에도 속하지 않는 온갖 잡동사니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총무과에서 매일 하던 일이 현장부서에서 가지고 온 공문이 문서 규정에 맞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되어 있으면 직인을 찍어주고, 아니면 퇴짜를 놓는 거였지요. 당시 문서규정이라는 것이 사실 세세히 살펴보면 아주 복잡했어요.
문서는 조직의 혈관이라고 할까? 당시 포스코 문화는 군사문화의 복사판이었는데, 5·16 이후 관공서, 기업체 등으로 유입된 군사 문화는 애초에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것이었습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그만큼 선진화 되어 있었어요. 서식(書式)은 문서 규정의 핵심으로 기본 방식이 엄격한 체계로 규정되어 있었지만 현장에서 보내오는 공문 서식은 제멋대로였어요. 특히 초창기 포항제철에는 전국 각지의 여러 기업체에서 옮겨온 사람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전 직장의 관행을 고집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부서 내부 문건이야 어쩔 수 없더라도, 외부 발송 공문만큼은 회사의 서식에 맞게 작성해야 한다. 그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Q. 신입사원으로 회사 생활하기가 쉽지 않으셨겠습니다.
한 번은 현장 과장이 박태준 사장의 결재까지 받은 공문을 들고 왔는데, 규정에 전혀 맞지 않았어요. 다시 해오라고 했더니 그 문서규정이라는 게 뭐 그리 대단한 것이냐며 쏘아보는 거예요.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직위 차이가 있고 해서 그냥 통과시켰어요. 그러자 당시 총무과장께서 왜 안 고쳐줬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그냥 넘어가 주면 계속 못 고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 분은 직접 나서지 않고 담당자인 저만 닦달했어요. 그런데 현장 과장이 또 틀리게 해온 겁니다. 내용이 중요하지, 뭐 그런 자잘한 것을 가지고 귀찮게 하느냐며 물러서지 않았어요. 그래서 내가 사장 결재까지 끝난 기안지를 볼펜으로 좍 그어 버렸어요. 난리가 났습니다. 신입사원 꼬리도 채 못 뗀 친구가 과장이 가져온 공문을 그어버렸으니 그럴 만도 했지요. 그것도 사장 결재까지 난 공문을.
Q. 규정이란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또 고집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그런 생각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게 남이 보기에는 융통성이 없었던 거지요. 수박 서리에 나서는 친구들을 말리는 성격 그대로였습니다. 규정대로 하면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시비를 거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관리자의 처지도 나중에 내가 관리자가 되고 보니 이해하게 됐습니다. 세상에 정답이 없다는 말이 참 맞는 말입니다.
Q. ‘수박 서리’를 말씀하셨는데,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 회장님 모습이 궁금합니다. 특별히 기억하고 계신 일이 있는지요.
그런 일이야 누구에게나 많지 않겠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 학교를 파하고 집으로 올 때 친구들은 더러 남의 수박밭이나 참외밭에 들어가 서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왜 그랬는지 늘 하지 말라고 말렸고, 서리를 해온 것들을 같이 먹지도 않았어요. 스스로 옳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대신 남이 그러는 것도 두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과 다투는 일이 많게 되었지요.
포스코에 입사하면서는 ‘어떻게 하면 중간에 쫓겨나지 않고 정년까지 잘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젖어 있었습니다. 성격이 진취적인 편이 아니어서 직장을 그만두면 가정을 제대로 꾸리고 아이들을 양육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소위 ‘범생이’ 기질이 강했어요. 좋게 말하면 원칙주의자였고 하지 말라는 것은 절대 안 했고, 교회에 다녔는데 교리에 어긋나는 행동도 일절 하지 않았어요.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나면 온종일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Q. 어린 시절부터 가장의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릴 때 내가 죽을 정도로 아팠던 적이 있었어요. 그때 어머니가 나를 살려달라고 기도하시면서 ‘관이만 살려주시면 북한에 있는 남편이 돌아오지 못해도 좋습니다.’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어머니는 내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감사하다고 하셨어요. 7살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며 ‘집안은 내가 일으켜야 한다.’는 가장 의식이 생겼습니다. 다른 집에 땔감을 마련해주고 모내기 일을 돕는 빈궁한 생활 속에서 제가 가진 가장 큰 재산은 어머니의 사랑과 굳건한 신앙 하나 뿐이었습니다.
사실 7살 소년이 짊어지기는 너무 힘든 역할이었습니다. “이놈아! 네가 그렇게 게으르니까 그렇게밖에 못 사는 거야! 당장 들어와서 일을 하든가 집으로 가든가 해!” 그런 말을 들을 적도 있었는데, 진짜 서러웠습니다. 어떻게 저렇게 심한 말을 어린 사람에게 할 수 있을까? 그 모진 말을 듣자 당장 집어치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어요. 참고 일을 하지 않으면 밥을 굶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굳게 먹기로 결심하고 다시 논에 들어가 하루종일 허리 숙여서 모를 찌고(모내기 철에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서 묶는 것), 모를 심고 나면 저녁에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Q. 학업을 이어가기가 벅찬 환경에서 경주에서 중·고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마치기까지 더 많은 고생을 하셨겠습니다.
주일학교에서 한글을 깨치고, 교사들의 권유로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했지만 남보다 더 노력해서 한 학기만에 우등생이 됐어요. 하지만 가정형편으로 곧 학업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 닥쳤습니다. 그때 손을 잡아준 사람이 레이몬드 프로보스트 선교사였습니다. 그 분의 도음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Q. 대학을 졸업한 뒤 직장을 구하면서 삼성이니 현대니 하는 대기업은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시중은행도 싫고, 특수은행을 목표로 하셨다고요?
여기저기 시험을 치렀어요. 포스코 채용 시험 1차에 붙은 후에, 면접자가 몇 사람 되지 않았기 때문이지 몰라도 면접에서 박태준 사장을 직접 만났어요. 내 차례가 되어서 들어갔더니 ‘경희대 나왔어? 공부 잘했네. 포철에 와서 열심히 할 거야?’ 하시는데, 내 모교를 인정해준 것이 너무 감격스러웠어요. 그때 박태준 사장이 40대 초반이었는데, 눈이 반짝반짝하고 외모가 무척 잘 생겼습니다. 나는 그때부터 포철에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후 출신학교, 출신지역 등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는 회사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게 오늘날의 포스코로 성장한 요인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Q. 1972년 들어서는 운송부 해운과에서 근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운송부의 물동량은 해외에서 들어오는 기계설비에서부터 건설 기자재에 이르기까지 엄청났습니다. 사무실에 관련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어요. 모두들 눈코 뜰 새 없이 일에 빠져 있었고, 나 역시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일은 힘들었지만 비로소 내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주말에도 쉰 적이 없었어요. 여기서 쫓겨나면 이제 갈 데도 없다는 위기의식도 한몫했을 겁니다. 그래서 휴일에도 교회 예배를 마치고 회사에 나갔어요.
그때 담당했던 국제 해운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수행을 요구하는 업무였어요. 바닷길은 변화무쌍하기 때문에 운송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변수를 다 따져서 해상보험료를 적용해야 했지요. 따라서 계약 하나 잘못하면 몇 천만 원, 몇 억 원씩 손실이 쉽게 일어날 수 있었어요. 관련 용어만 해도 엄청나서 다 외울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무역 거래조건으로 FOB와 CIF가 가장 많이 사용되지만 FOB BERTH TERM, FOB ST, FOB FAS 등 변형이 많습니다. CIF도 환리스크를 매도자 부담으로 하는 CIF&E, 특수한 수수료를 포함하는 CIF&C, 환어음에 대한 이자를 포함하는 CIF&I, 수수료와 이자를 포함하는 CIF&CI, 보험 조건을 제외한 C&F 등 다양한 변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도 조건, 운임, 보험료, 환율, 수수료, 관세, 이자 등 온갖 변수를 다 따져서 최적의 조건을 찾아내야 해요.
Q.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화를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1978년 7월인데, 3기 설비 공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때였어요. 해운과장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세심(SECIM) 사에서 제작한 300톤 제강 전로(轉爐)가 운송 도중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부두에서 하역한 후 현장으로 이송하다가 발생한 대형사고였어요. 다시 제작해 포항에 도착하려면 최소 5개월이 소요된다는 것이 세심 측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때 해운과장 자격으로 박태준 사장 보고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사고는 3기 설비 공기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니 건설본부에서 보고를 맡았는데, 내용이 이상하게 흘러갔습니다. “이것저것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3~4개월로 맞춰 보겠습니다” 하고 보고해야 할 텐데, 감독이 제대로 안 붙고 어떻고 하면서 사고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는 겁니다. 결국 그 사고로 3기 설비 공기가 1년 늦어지는 걸로 보고를 마쳤습니다.
사실 프랑스 측과 잘 조정하면 3개월 안에 전로가 도착할 수 있는 일이었어요. 미리 모든 준비 작업을 완료해 놓고, 전로 도착과 함께 작업에 집중하면 공기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수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곧 박태준 사장으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지고, 사고 책임자인 나도 파면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박태준 사장은 “지극히 원시적인 사고구먼. 제철소장이 잘 수습해봐!”라고 말하면서 문책도 하지 않고 자리를 나섰어요. 현장에서는 작은 사고만 나도 벌을 받고 하는데, 왜 봐주느냐며 모두들 야단법석이었지요. 그때 박태준 사장께서 왜 큰 벌을 내리지 않으셨는지 아직도 궁금합니다. 박태준 사장 부친의 성함이 ‘박봉관’으로 나와 동명(同名)이었는데 혹시 그래서였는지, 아니면 오한구 부장이 당신이 아끼던 육사 후배였기 때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Q. 업무 수행에서는 물론 마음으로도 고생이 컸겠습니다.
사건 이후 일주일 동안 동분서주하면서 현장 상황을 수습하고 서둘러 프랑스로 가야 했어요.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요. 내일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아침부터 배가 아프더니 결국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일주일 동안 밤잠을 못 자고 스트레스를 받은 것이 원인이었어요. 급기야 병원에서 엑스레이 촬영을 하는 도중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다음날 오후 4시에야 깨어나 그 다음날 바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랐어요. 프랑스에서 세심과 성공적으로 협의를 마친 뒤 설비 메이커가 있는 독일, 영국을 거쳐 돌아오면서 인도에도 잠깐 들렀다가 15일만에 귀국했습니다. 출장 중에는 멀쩡했는데, 포항에서 용광로가 눈에 들어오니 또 소화불량이 일어나는 겁니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심했던 거지요.
Q. 13년간 근무하면서 얻은 교훈이라면 어떤 점이 있는지요.
포항제철에서는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 내가 판단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경영자의 입장에서는 옳은 것도 틀린 것일 수 있고, 내가 아무리 옳아도 상대가 아니라면 아닌 것이었습니다. 그 중심에는 언제나 상대방이 있고, 상대방의 판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원칙주의자입니다. 원칙에 충실할 때 융통성도 나오고는 법입니다. 이도저도 아닌 어름어름한 것을 융통성으로 포장하는 것은 자기기만이에요. 원칙이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융통성이 원심력으로 작용해 조화를 이룬다면 이상적입니다. 요약하면 융통성이란 기본적으로 원칙의 확장 영역 내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Q. 남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직장을 그만 두고 창업의 길로 나섰는데, 입사 당시부터 그런 계획을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입사 2년차 무렵에 서울에서 근무하던 동기가 계약 관련 조사차 포항에 내려온 적이 있습니다. 후에 전무이사에까지 오른 동기였는데, 처음부터 서울로 발령을 받아 계약 업무를 맡고 있는 친구였어요. 포항에서 문서규정이나 따지고 있던 나로서는 국내 굴지의 회사들과 계약 관계로 교류를 트고 있는 그 친구가 하늘 같이 대단해 보였지요. 나는 어떻게든 회사에 오래 붙어 있기를 소망하고 있는데, 좋은 부서, 좋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내가 회사에 있으면 얼마나 있겠나. 내 사업 해야지…’ 하며 여유를 보이는 그가 부러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상일이란 정말 알 수가 없는 건가 봅니다. 그러던 동기는 회사에 정년까지 남아서 전무이사에 올랐고, 직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전긍긍하던 나는 일찍 나와 사업에 투신했으니 말입니다. 1983년에 운송전문업체를 인수해 유성화물을 설립하고 화물차 20대로 운수업을 시작했습니다. 현재 유성티엔에스가 그 회사입니다.
Q. 서희건설은 ‘서희스타힐스’ 아파트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시공능력평가 32위의 중견 종합건설회사입니다. 1994년 업종을 건설업으로 바꾸고 회사 이름도 서희건설로 변경했습니다. 사업 초기에는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의 토건 정비 공사를 시작으로 조달청 발주공사, 지자체 발주공사 등을 따냈습니다. 건설업계는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주택사업에 주력하는 다른 건설사와 달리 교회·학교·병원을 짓는 특수건축 분야와 지역주택조합사업 등 이른바 ‘틈새시장’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습니다. 건축, 주택, 토목 및 환경 플랜트 등 건설사업부문 전반에서 최고의 경쟁력을 가진 회사로 자리매김하며 YTN 상암동 신사옥, 대전무역회관, 경원선 5개역사, 홍익대 대학로캠퍼스와 명성교회 외 40여개 종교시설, 해운대 백병원 가천대 길병원 외 10개 의료시설, 성남 판교 지구 외 42개 LH아파트, 당진, 여수화력발전소를 준공했습니다. 그동안의 기술과 실적을 인정받아 2014년 한경주거문화대상 아파트대상을 비롯하여 한국건축문화대상, 서울시·경기도 건축문화상, 한국토지주택공사 우수시공사 2회 선정, 한국노사협력대상, 사회공헌기업대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학교와 병원과 교회의 예배당 건축은 건설사들이 기피하는 공사였어요. 시공과 관련해서 발주처의 관계자가 많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요구사항들이 발생해 건설사들이 꺼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서희건설은 ‘다른 생각’으로 접근했습니다. 힘들고 손해 보더라도 사회에 꼭 필요한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 이 땅의 곳곳에 서희건설의 이름으로 예배당을 건축한다는 믿음으로 2009년 국내 최대 규모 교회 공사였던 명성교회 공사를 비롯해 삼일교회, 역삼동 청운교회, 포항중앙교회 등 전국 1만평 이상 되는 초대형 교회 대부분을 시공하는 등 교회 공사로는 업계 최강자로 통합니다. 이윤을 생각하지 않고 예배당을 건축했더니 당당히 건설업계에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됐지요. 또한 예배당은 정성과 정직을 기울여지어야 해요. 편법이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서희건설은 ‘정직한 건축을 해야 한다’는 올바른 생각을 고수할 수 있었습니다.
Q. 교회·학교·병원을 짓는 특수건축 분야와 지역주택조합사업 등 이른바 ‘틈새시장’에 역량을 집중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다는 말씀이시군요.
학교나 병원도 순수 민간자본사업이 아니라 건설 과정이 복잡하기는 교회 못지않습니다. 하지만 이 분야에 뛰어들어 국내 최초로 민간자본을 도입해 건립한 경희대 국제캠퍼스 제2기숙사를 시작으로 31개교를 준공했습니다. 병원 건축은 전문성·다양성·복잡성 등에서 발생하는 특수성 때문에 포괄적인 시공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특히 2007년 당시 1950억 원 규모의 인제대 해운대 백병원은 국내 대학병원 최초로 순수 민간자본공사인 동시에 1004개 병동의 초대형 도심형타워 형태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밖에도 고려대병원 등 10여개의 크고 작은 병원을 건설해 온 노하우로 병원 건축에 있어서는 국내 최고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2008년부터 지역주택조합 아파트 사업에 집중하면서 전국적으로 큰 사랑을 받아 이 시장의 대표건설사로 자리잡았습니다. 지역조합아파트 선두주자로서 그 동안 쌓인 경험을 통해 사업의 안정성을 도모하는 한편, 고객에게 신뢰도를 높이고 있습니다.
그 결과 2012년 2270억 원에 불과했던 지역주택조합 수주 금액이 2015년 이후 1조 원 이상 규모로 늘었고, 현재까지 12개의 단지를 준공했고 20개 단지가 시공 중에 있으며 전국 최다인 100여 개 단지(9만여 세대)를 추진, 최소 5년 치 물량을 진행 중입니다. 2015년부터 매출 1조 원 이상 규모로 늘었고, 현재까지 12개의 단지를 준공했고 20개 단지가 시공 중에 있으며 전국 최다인 100여 개 단지(9만여 세대)를 추진, 최소 5년 치 물량을 진행 중입니다. 2015년부터 매출 1조 원을 넘겼고 한국신용평가로부터 무보증사채 신용등급상향 조정과 등급 전망을 ‘안정적’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기업의 신용등급 상승과 함께 자금조달 능력이 더 원활해질 전망이어서 주력 사업인 ‘지역주택조합 사업’ 또한 더욱 탄력을 받을 것으로 전망합니다.
Q. 서민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사업은 무엇보다 투명하고 안정적인 사업 진행이 필요할 텐데, 서희건설이 지켜가고 있는 남다른 원칙이라면 어떤 점을 들 수 있습니까.
지역주택조합은 사업 토지 확보와 사업 인허가, 자금 관리의 안정성 부분에서 위험성이 따릅니다. 조합설립인가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예상 분양 가구의 50%에 달하는 조합원을 모집해야 하고, 사업승인을 위해 95% 토지를 확보해야 하므로 사업추진에 겪는 어려운 문제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지요.
많은 지역주택조합이 서희건설을 시공사로 선정하는 이유는 타 건설사들처럼 단순 시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되는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해 자체사업을 추진하듯 관리한다는 것이 입소문을 탔기 때문입니다. 서희건설이 시공하는 단지마다 착공까지 이어지는 요인 중 하나는 ‘80% 조합원 모집 후 착공’이라는 원칙 때문입니다. 법으로만 따지면 주택조합은 가구의 50%이상의 조합원만 모집하면 사업승인이 가능해 착공에 들어갈 수 있지만, 서희건설은 80%이상 조합원 모집 후 착공에 들어갑니다. 이 원칙은 착공 후 느슨해질 수 있는 조합원모집을 미연에 방지하고 사업의 빠른 진행과 안정성을 높여 사업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불신은 줄였습니다.
Q. 주택과 토목사업 등 이미 치열한 격전이 빚어지고 있는 전형적인 건설시장에서 한 발 벗어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틈새시장을 찾는 ‘블루오션’전략을 전개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지난 2000년부터 환경에너지 자원화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국제적으로 각종 환경규제가 강화되면서 대체에너지 개발에 대한 필요성이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미래형 환경에너지 시설 사업을 유망 성장산업으로 육성할 수 있다는 판단이 배경이 됐습니다.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남들이 꺼려하는 것을 실행으로 옮겨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서희그룹을 이끌어왔습니다.
서희건설은 이미 15년 전인 2001년 국내 최초로 쓰레기 매립지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전력을 생산하는 LFG(Land Fill Gas, 매립가스) 발전소를 부산 강서구에 짓는 등 포항과 광주, 제주 등 13곳에서 발전소를 가동했습니다. 서희건설은 한 단계 더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 ‘균형 잡힌 사업 다각화’를 추진 중입니다. 또 새로운 사업으로 재개발·재건축사업과 기업형 임대주택사업(뉴스테이)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2015년 ‘남양주 진주아파트’ 재건축사업을 수주하며 첫발을 내딛었고 2016년 3876억 규모의 ‘청주 사모1구역’ 대규모주택 재개발사업을 첫 수주해 도시정비사업을 향한 본격적인 사업 확대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LH의 뉴스테이 4차 ‘대구금호’ 사업자로 선정되어 성공적으로 분양을 마쳤으며, LH 뉴스테이 8차 ‘시흥장현’ 사업자로도 선정됐습니다. 또한 2020년까지 경기도 평택시 안정리 일원에 기업형 임대주택 818세대를 공급할 예정인데, 이는 자체사업으로 공급하는 첫 기업형 임대주택이라는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Q. ‘취업’문제가 끊임없이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취업 준비생에게 격려 말씀 전해주십시오.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나아가는 것, 또 하나는 주저앉거나 물러서는 겁니다. 뛰어난 인재는 바로 이 순간에 구분됩니다. 벼랑 끝에서 절망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만 치열한 경쟁사회 속에서 자신의 꿈을 실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가장 푸른 잎이 맨 위에서 나무의 성장을 이끌어 가듯, 푸른 젊은이들이 변화의 맨 앞에 서 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가 건강하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꿈을 가질 수 있습니다. 책상에 앉아 스펙 쌓는 데만 집중하지 말고 젊었을 때만 할 수 있는 도전에 과감하게 한 번씩 깊게 빠져 보길 권하고 싶습니다.
Q. 최근 드론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인 Price Waters Company는 2016년 보고서에서 세계 무인기 시장 가치를 1270억 달러(148조) 예측했습니다. 이 가운데 건설 인프라 분야가 452억 달러를 차지해 앞으로 가장 많이 활용될 분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국내 건설시장에서도 드론 활용이 점차 확대되고 있습니다. 서희건설에서도 국내 최초로 아파트 건설 공정관리에 드론을 활용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드론의 활용 영역은 아파트 건설 공정관리뿐만 아니라 고객을 위해서도 넓게 열려 있습니다. 이를테면 고층 아파트 상층에서 조망할 수 있는 주변 환경을 드론으로 입체적으로 촬영해 제공한다든가 혹은 그것을 3D 모듈화 하고 바로 데이터베이스화 할 수 있는 여러 서비스의 통합적인 솔루션을 통해 다른 건설사와 차별화를 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서희건설 역시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의 흐름을 읽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드론활용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Q. 아파트 건설 공정관리 이외에 서희건설에서 드론을 다른 용도로 활용할 계획이 있으신지요?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화두가 판문점선언, 북미정상회담 등으로 이어지는 남북관계 개선입니다. 남북경협에서 DMZ을 비롯한 접경지역의 지뢰를 제거하는 문제가 필수 과제로 떠오르고 있어요. 서희건설은 지난 6월 11일 한국지뢰제거연구소와 ‘국내(DMZ 및 접경지역포함)외 지뢰제거사업’을 위한 업무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남북경제협력의 초석이 될 국내외 지뢰제거와 남·북 교류사업 공동 추진에 나선 것이지요.
서희건설이 사업 주관하고 연구소는 지뢰조사, 탐지, 제거에 직접 참여합니다. 생태계 파괴를 최소로 하는 친환경 지뢰제거기술을 함께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한국지뢰제거연구소는 ‘지뢰박사’라고 불리는 국내 최고의 지뢰 및 폭발물 탐지분야 전문가 김기호 소장을 필두로 M14대인지뢰를 지표 아래 최대 20cm까지 탐지할 수 있는 지뢰탐지기와 한국형 다용도 지뢰 제거장비(세계최초개발)에 대한 특허를 보유하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경의선철도 및 남북도로연결, 주한미군 스토리사격장, 양구 두타연 이목교 지역에서 직접 다량의 지뢰를 제거한 국내 유일한 지뢰제거 전문 연구 단체입니다.
또한 지뢰피해자 지원법을 통한 피해자 지원사업, DMZ에 생태공원을 조성하여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사단법인 녹색평화연합도 함께 이끌고 있습니다. 이런 전문기술과 드론산업을 연결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으로 지뢰를 제거할 수 있는 사업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나드론의 모회사인 제양항공해운 김성호 회장과 지뢰를 제거하는 드론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차후 좋은 모델이 등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저희 아나드론은 국내 유일의 본격적인 드론 전문 월간지입니다. 독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광야로 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고, 온실로 보낸 자식은 콩나물이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시련과 도전은 인생의 보약이 될 것입니다. 경쟁에 있어서도 타인과의 경쟁보다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남보다 잘해도 자기 기준에서 전보다 못하면 성취감을 느낄 수 없습니다. 전보다 잘하려는 노력이 전보다 나은 나 자신을 만드는 원동력임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아나드론이 소개하는 드론과 대한민국의 4차 산업혁명에 관련 소식들이 앞으로 우리 사회의 미래 산업에 더 나은 방향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서희건설은 다른 건설사가 주목하지 않던 틈새시장을 공략하며 전국의 교회, 학교, 병원 등 민간건축분야에서 전문화된 기술력과 뛰어난 경쟁력을 바탕으로 건설업계 블루오션을 집중 공략하며 안정적 수익모델로 명성을 구축해 왔다. 1999년 코스닥 증권시장에 신규 등록을 마치고, 장기적인 경기침체로 SOC 투자 감소, 부동산 억제 정책, 해외사업의 감소 등으로 국내 건설시장이 불황이 지속되자 빨리 큰 돈을 벌 수 있는 사업보다 속도가 늦더라도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사업으로 전환을 모색했다.
2003년 경기 성남시 분당구로 본사를 옮겼다. 서희건설은 2001년 부산 생곡 쓰레기 매립장 가스 발전소, 2006년 워터파크인 스파그린랜드와 세종대 집현관, 2007년 경원대 기숙사, 2008년 국내 첫 민영 교도소인 아가페 소망교도소를 짓는 등 건축과 주택은 물론, 토목, 플랜트 및 시설물, 환경, SOC(사회간접자본)에 이르는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시장을 열었다.
고희(古稀)를 넘긴 이봉관 회장은 여전히 열정적이었다. 촬영 내내 유머와 여유를 잃지 않는 센스를 가지고 있었고, 아이디어와 추진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는 이태 전인 2016년 봄, 그는 자신의 인생 역정과 종교로 입은 은혜를 진솔하게 고백한 책 한권을 펴냈다. 『CEO의 기도』가 그것으로, 역경과 고난 속에서 함께 했던 종교적 체험을 고백하고 그동안의 기도문을 담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을 살아오면서 어려움과 고난을 만났을 때 그리고 사소한 일상까지, 항상 기도하면 기쁨과 평안을 느꼈다. 나는 기도를 통해서 인생의 아무리 큰 문제도 하찮은 문제로 여길 수 있었다.” 이봉관 회장은 기도문이 곧 자신의 삶이라고 말한다. 서희건설의 성장 또한 그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응답 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진정성이라는 마음에 대한 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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