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온한 고요.
매끈한 겉면.
표면의 사실.
미세한 진동.
드러난 실금.
이면의 진실.
전시장 스피커에서 가라앉은 울림이 새어 나왔다. 우물 속에서 물이 차오르듯 서서히 쌓인 소리는 곧 트럼펫이 세 개의 음을 찍어 올리며 터져 나왔다.
"큐레이터님, 왜 이 고요한 풍경화에 이렇게 소란스러운 음악을 입히셨나요?"
팬데믹 이후의 서울은 마스크 너머 서로의 숨결을 통제하며 격리되어 있다. 호른의 음역 위로 C-G-C로 도약하는 완전 8도의 배음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단호하다. 빈틈없는 안정을 생성하는 협화음 아래, 서로 다른 진동수가 끊임없이 부딪혔다.
미술관의 조명은 차갑고 정교하다. 미애는 그림이 걸린 짙은 남색 벽면 앞에 섰다. 작품 설명 패널의 문장을 몇 번이나 고쳐 썼던 자리다. [항구는 정지했고 배들은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가 적어 내려간 사실은, 남자가 방금 0.1밀리미터까지 고정해 둔 완벽한 수평과 닮아 있었다.
핸들을 잡은 손등 위로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라디오에선 며칠째 '국가 부도'니 '금 모으기'니 하는 뉴스만 흘러나왔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누렇게 지친 표정이고 나도 마찬가지다. 새벽마다 들려오는 미터기 소리는 내가 하루동안 악착같이 버텨야 할 시간을 알려주는 신호일뿐이다.
가난보다 무서운 건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IMF라는 거대한 파도가 집안의 가구며 집기들을 하나 둘 쓸어갔을 때 아내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그 텅 빈 구멍을 잠시나마 메워준 건 그녀의 미소와 몽롱한 향수 냄새였다. 우울이 목까지 차올라 숨이 턱턱 막힐 때마다, 나는 꿀 같은 그녀의 웃음소리 한 방울을 갈구했다. 결국 그 달콤함은 독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게 남은 건 낡은 택시 한 대뿐이다. 이제는 꺾인 나뭇가지를 붙잡을 힘조차 없다.
아빠가 농약을 먹었대. 다 그 여자 때문이야. 화장 진한 그 여자, 독한 향수를 풍기는 그 여자 말이야. 삼촌이 그러는데, 아빠가 몰던 택시 처분하면 사백만 원 정도 받을 수 있대. 그게 아빠가 남긴 전부인가 봐. 아빠는 매일 택시 운전하면서 우리 뒷바라지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아빠는 그 술집 여자를 너무 좋아했었나 봐. 그 여자가 더 이상 아빠를 만나주지 않으니까 그걸 못 견디고 그냥 그렇게 가버렸어. 그 여자가 너무 싫어. 아빠를 그렇게 만든 그 여자도 싫고, 우리보다 그 여자가 더 소중했던 아빠도 미워.
들썩이던 미애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지윤은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낸다. 꼬인 줄을 풀어 한쪽을 미애의 고막에 닿게 찔러 넣었다. 지윤이 재생 버튼을 누르자 침묵을 뚫고 파동이 일어선다. 낮은 C음에서 시작해 하늘을 찢듯 솟구치는 비명. 막 터뜨리지 못한 울음이 대신 쏟아지는 것 같다. 심장이 그 소리에 맞춰 무자비하게 두드려졌다.
“이 그림, 이상하죠?”
미애는 놀라지 않았다. 개관 전 전시장에 발을 들일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캔버스의 미세한 수평과 조명의 각도를 집요하게 수정하며 그가 덧붙였다.
"배들은 모두 정박해 있는데 항구는 너무 화창해요. 보통 이렇게 날이 맑으면 떠나야 하는 법이잖아요."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그림이 달고나 같네요.”
정적을 깨고 계속 끼어드는 목소리에 도록을 넘기던 미애의 손이 멈췄다. 그는 프레임 앞까지 바짝 다가서 있다.
“달고나요?”
미애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남자는 액자 유리에 비친 빛을 손끝으로 더듬듯 말했다.
“어릴 때 설탕 녹여서 만들던 뽑기 있잖아요. 우리 눈에 보이는 건 매끈하고 반짝거리는 겉면뿐이죠. 살짝만 힘을 줘도 부서지는 속은 안 보이죠.”
미애는 습관처럼 큐레이터의 해설을 꺼냈다.
“작가는 정적인 안온함을 의도했습니다. 떠나지 않는 배들을 통해 안정된 시간을 표현했죠.”
개의치 않고 이어가는 그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사실 말고, 진실을 보세요. 이건 억지로 붙들어 놓은 평온이에요. 빛이 너무 강해서 보이지 않을 뿐, 저 배들의 안쪽은 투명한 금이 가 있는 상태랍니다."
미애가 큐레이팅한 전시장의 백색 소음 사이로 카탈로그에 실릴 악보 한 장이 놓여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오르간 소리가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더니, 금관악기가 번쩍이며 공기를 갈라 관객들이 붙들고 있는 평화를 해체한다.
“큐레이터님, 왜 이 고요한 풍경화에 이렇게 소란스러운 음악을 입히셨나요?”
관람객의 물음에 미애는 알베르 마르케의 〈햇빛을 받는 알제리의 부지 항구〉 속 수평선을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뗐다.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요.”
인사동 큰길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 초입, 보도블록 한구석에 낡은 파라솔이 기우뚱 서 있다. 노란 가스통 위로 연결된 버너에서는 푸르스름한 불꽃이 쇳소리를 내며 끈적한 날을 갈아내고 있었다.
노인의 손에 들린 국자 안에서 서너 스푼의 설탕이 제 몸을 녹여 액체로 변해간다. 열기에 따라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작은 기포를 터뜨리다 누룩 같은 연기가 미애의 코끝을 스친다. 마스크 틈새를 뚫고 들어오는 냄새가 선명하고 극적이다.
수평계를 든 파란 작업복을 입은 남자가 떠올랐다.
'그림이 달고나 같네요. 겉은 반짝이지만 안쪽은 금이 간 상태인 거죠.'
노인이 플라스틱 통에서 소다를 끄집어내 툭 던졌다. 캐러멜 같던 색이 순식간에 명도를 높이며 연한 개나리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스테인리스 판 위에 쏟아진 달고나는 금세 평평하게 눌렸고, 정확한 모양의 틀이 별을 찍어낸다.
어릴 적 달고나 게임을 할 때, 미애는 바늘 끝으로 주변을 사정없이 파헤쳤다. 그래야 안쪽에 숨겨진 무늬가 제대로 또렷해졌다. 예술은 달고나처럼 금이 갈 때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달콤한 표면을 부수어, 이면의 씁쓸한 진실을 꺼내야 실체가 보인다.
그녀는 세피아색 지갑을 열어 단정한 지폐를 건넨다. 거슬러 받은 동전의 차가운 금속성과 달리, 비닐봉지 속 달고나에는 갓 구워낸 설탕의 온기가 배어 있다. 그 온도가 손바닥을 덥힌다. 오래 눌러두었던 기억이 다시 데워지는 것 같다.
미애는 쪼개진 조각 하나를 입안에 넣었다. 혀에 닿는 첫맛은 지독히 달다. 아버지가 탐했던 그 여자의 살내음처럼, 긴 폐쇄의 끝에 마주한 해방감처럼 비현실적인 당도다. 침에 녹아든 설탕이 목구멍을 넘어갈 때쯤, 혀 뒤편에서 감출 수 없는 쌉싸름한 탄 맛이 올라왔다.
'예술도 비슷한 것 같아요. 겉이 깨질 때 비로소 안이 보이니까.'
금빛 낙조 위에 그리던 남자의 굵은 선이 점처럼 흩어진다. 미애는 마지막 남은 달고나를 씹었다. 바스락 부서지는 소리는 슈트라우스의 종지부처럼 짧고 강렬하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