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이 진들

by dropfairy

"여러분, 임마누엘 칸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사물 그 자체인 '물자체'를 볼 수 없다고요.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의 렌즈, 즉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식의 안경을 통해 굴절된 '현상'일 뿐입니다."


강단 위 교수의 목소리가 202호 강의실의 정적을 깊숙이 갈랐다. 창밖에는 잎도 없이 피어난 백목련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강제로 입을 벌리려다 실패한 것처럼 꽃잎 끝이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목련만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읊조리는 문구가 생겼다.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고등학교 시절 교육학 담당이었던 옥희 선생님이 나눠 준 프린트물에 새겨진 시의 도입 구절이다. 5.18 관련 시라고 배웠지만, 사실 목련은 5월이면 이미 자취를 감춘 뒤다. 시인은 왜 하필 5월에 '목련이 진들'이라고 노래했을까. 그것은 실제의 목련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억 속에 박제된 '현상'으로서의 목련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수님, 만약 우리가 보는 것이 굴절된 현상뿐이라면, 진짜 사건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건가요?"





"혹시 망월동 묘지 가본 사람 있어?"


"망월동 5.18 묘지? 나는 안 가봤는데."

내가 답하자 질문을 던진 너도 안 가봤단다. 옆에서 사진을 찍던 미애도 고개를 저었다.


"광주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는데 한 번은 다녀와야 하지 않겠니?" 네가 말하자 딱히 부정할 이유가 없어 우리는 머리를 끄덕이게 되었다.


묘역에 들어선 너는 찬찬히 걷다 돌연 걸음을 멈추고 콧등 위 안경을 추켜올렸다. 네 시선은 비석마다 새겨진 숫자들에 낱낱이 머물렀다.


"얘들아, 여기 좀 봐. 우리랑 같은 숫자가 너무 많아."


친구의 눈이 향한 곳에는 1980년에 마침표가 찍힌 생애들이 줄지어 있었다. 교문에 걸린 축하 현수막을 만끽하고 막 어른이 되려는 생과는 너무도 다른, 멈춰버린 시간들이 한데 놓였다.






"야, 정인아! 밖에 좀 봐. 저기 대학생 언니 오빠들 아니야?"


지윤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자율학습 중이던 너는 펜을 놓았어. C대 사범대 부속 고등학교 교실 창밖으로, 수업도 다 끝나 비어있던 운동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지. 대학생들과 경찰들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어.


"경찰이 왜 여기까지 들어와? 여긴 고등학교잖아!"


네가 황당해 묻는 순간,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어. '텅—!'


찰나의 정적 뒤로 하얀 가루가 폭발하듯 쏟아졌지. 열린 틈을 침범한 공격자가 순식간에 교실을 매캐하게 점령했어.


"으윽, 이게 무슨 냄새야? 눈이... 눈이 안 떠져!"


지윤이가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어. 너 역시 코를 찌르는 매서운 공기에 숨이 턱 막혔지. 눈물, 콧물, 침까지... 몸의 모든 구멍이 열려버린 것처럼 줄줄 흘러내렸어. 이 무자비한 기체가 최루탄 가스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어.


"지윤아, 괜찮아? 손대지 마, 더 따가워!"


너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지윤을 불렀어. 이미 눈앞은 눈물로 번져서, 지윤의 뒷모습조차 물감처럼 퍼져 보였지. 마음속에선 의문이 솟구쳤어.


"대학생들은 왜 저렇게 필사적으로 데모를 하는 걸까? 그리고 경찰들은... 아무리 진압이 급해도 어떻게 학교 운동장에서 최루탄을 던질 수가 있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지. 훗날 알게 됐어. 별안간 떨어진 연기가 교실 창을 넘었듯, 곧 닥쳐올 IMF라는 재앙도 예고 없이 우리를 덮쳤다는 걸. 구조조정과 청년실업이라는 거대한 파도는 고등학생인 너희에게도 파편처럼 밀려 박혔어.








목련 때문에 녹색 파일을 들춰보다, 자율학습 시간에 쪽지를 건네던 너를 발견했어. 나와 별로 닮은 구석이 없는, 그렇다고 특별히 너 같지도 않은 얼굴을 너는 무얼 생각하며 그렸던 걸까? 내게 주고 싶었던, 어쩌면 네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그런 너를 정말 정말 사·랑·해" 였을까?


그림을 천착하니 무더웠던 그날, 문제집에 시름하며 늘어졌던 그 오후로 되돌아가. 갑작스레 잠입한 희뿌연 통증 덕분에 우리는 같이 울었지. 그때, 세수를 하려 걷어 올린 네 소매 아래로 너의 왼쪽 손목을 보았어. 여러 갈래로 가로지르던 그 선명하고 아픈 흔적들을 말이야. 반추하다, 윤리 시간이 끝난 후 네게 말했지.


"정인아, 오늘 배운 칸트 말이야. 우린 각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해석해서 볼 뿐이고, 그 너머에 있는 진짜 세상은 알 수 없대. 근데 칸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뭔지 아니?"


"그것으로 좋다(Es ist gut)"


내가 전하고 싶었던 건 단순히 철학자의 명언이 아니었어. 우리가 서로의 고통을 완벽히 이해할 순 없어도 함께 아픔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나만의 고백이었지. 한 여름에도 긴 팔만 입던 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할퀴었을 그런 너를 그냥 안아주고 싶었어.


네가 그어 내린 그 아픈 흔적조차 네 삶의 일부이니, 나는 그것조차 '좋은 것'이라고 믿기로 했어. 꽃이 지고 피고, 우리의 상처가 생기고 옅어지는 것 또한 살아가는 과정일 뿐이니까. 목련과 네 그림, 우리가 통과해 온 그 아릿한 터널, 지울 수 없는 흉터까지 우리의 역사가 되겠지.




여전히 칸트를 말하는 네 목소리가 이제는 너른 강의실을 가득 채우고 있겠지? 내 팔에 새겨진 선들을 실패한 낙서가 아니라 삶의 무늬라고 불러주었던 너. 해석하려 하지 않고 포장하지 않고 그 자체로 그런 나를 알아주었지.


지윤아 정말이지, 그것으로 좋다.

'그런 너'라서 '그런 나'라서 좋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