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저 나무들은 왜 온몸에 눈을 뜨고 있어?"
여덟 살 난 딸, 지윤이가 하얀 자작나무 줄기에 박힌 검은 무늬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윤이의 작은 손가락 끝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바람이 실린 자작나무의 바스락 거림이 숲을 채웠다.
"저건 나무들이 세상을 구경하는 눈이야. 우리가 이 숲에서 길을 잃지 않게 지켜보고 있는 거지."
"그럼 저 눈들은 우리가 죽는 것도 다 봐?"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빠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며칠 전 키우던 강아지를 떠나보낸 뒤, 부쩍 죽음에 대한 물음이 늘어났다.
"저 나무는 우리가 웃고 사랑하는 것도 다 지켜보고 기억해. 그리고 죽는다는 건 무서운 게 아니야. 아주 긴 산책을 하다가 잠깐 멈춰 서서 쉬는 것과 같단다.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거지만, 그건 저기 보이는 마을 불빛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비슷해. 우리는 몸속 생명 건전지를 써서 그 불빛까지 꾸준히 걸어가는 거란다."
순간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라는 자책이 들었다. 도꾸의 죽음을 못내 아파하는 딸아이를 위로해 주기 위해 두서없이 만든 말이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음을 향해 걸아가는 거'라니.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이에게 이 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하던 틈에 지윤이가 말했다.
"그럼 아빠, 도꾸는 마을 불빛에 다 도착해서 지금 쉬고 있는 거야?"
지윤이가 자작나무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럼. 도꾸는 아주 걸음이 빨랐으니까 누구보다 먼저 도착해서 따뜻한 난로 옆에 누워 있을 거야. 우리가 나중에 도착하면 꼬리를 흔들며 마중 나오려고 말이야."
아빠가 억지로 만든 대답에 지윤이가 꽤나 만족한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수만 그루의 하얀 수피가 내뱉는 숨결은 미세하게 조각난 유리 알갱이 같았다. 하늘로 솟아오른 자작나무 숲은 거대한 은빛 감옥 같기도 하고, 신을 모시는 신전의 기둥 같기도 했다. 광목 수의를 두른듯한 나무들은 저마다의 검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눈 위에 주저앉아 반쯤 찬 약병을 만지작거렸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모아 온 나의 마지막 안식처였다.
약을 차곡차곡 목으로 넘기던 참이었다. 나무 위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빛의 잔상이 스쳤다.
"그걸 먹으면, 정말 모든 게 끝날 수 있다고 믿어?"
맑지만 서늘한 목소리였다. 미간을 모아 집중하니 자작나무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요정이 보였다. 인간의 아이를 닮았지만, 눈동자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투명했다. 요정의 등 뒤로 돋아난 날개는 서릿발이 엉겨 붙은 듯 날카롭게 빛났다.
"죽음이 다가올 때는 거센 물결이 한 곳으로 쏠리는 것과 같아. 네가 모은 그 작은 알약들이 거대한 생의 흐름을 정말 막아 세울 수 있을까?" 요정은 내 곁으로 내려앉았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산다는 건 결국 죽음을 향해 가는 거잖아. 나는 조금 빨리 걸어가려는 것뿐이야."
요정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뺨을 스쳤다. 손가락이 닿은 곳이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언젠가 도착할 그곳에 빨리 가면 네가 조금 더 행복할까?"
입 안에 포개 넣은 알약들이 식도를 타고 무덤처럼 쌓여갔다. 지윤이는 자작나무 숲의 환영 속에 잠겨 있었다. 요정의 날개 가루가 눈앞에서 반짝였고, 일렁거리는 파문은 여울져 밀려왔다. 소용돌이 근처로 떠내려가다 사뭇 그리운 냄새가 떠올랐다.
지윤이는 젖은 솜이 된 몸을 이끌고 안방 문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엄마의 숨소리가 잔잔한 수면 같다. 파고들 듯 품속으로 기어 들어가 폐 속 한가운데까지 엄마의 체취를 빨아들였다. 세차게 숨을 쉬어 뱃속 끝까지 살내음을 채웠다.
잠결에 지윤이를 느낀 엄마가 몽롱한 손길로 아이를 끌어안았다. 잠시 후, 엄마는 딸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차갑다는 것을 깨닫고 눈을 떴다. 손에 닿은 지윤이의 입술이 나무껍질처럼 뻑뻑하다.
"엄마, 나 수면제를 많이 먹었어. 곧 죽을 거야."
뛰쳐나간 엄마는 움켜쥐고 온 토마토를 딸의 입에 갖다 대었다.
"지윤아, 이것 좀 먹어봐. 정신 차려야 해."
뭉글하게 으깨진 떠름한 과육이 지윤이의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들었다. 설익은 노란 과즙이 목구멍을 자극하는 순간, 거부 반응이 일어났다.
지윤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화장실로 뛰어간 지윤이는 속을 뒤집어내듯 뜨거운 덩어리들을 쏟아냈다. 반 정도 형체가 살아남은 알약들이 선홍색 토마토와 뒤섞여 바닥에 흩뿌려졌다. 생명의 본능이 죽음의 잔해를 밀쳐내며 저항했다.
'루 살로메'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오빠였다. 매를 버는 동생을 짓이기던 그 오빠가 맞다. 오빠는 나를 죽이려던 것도 같고 살리려던 것도 같다. 당장 죽고 싶게끔 처절하게 응징하다 상처 입은 동생에게 직접 약을 발라주던 사람도 오빠였다.
환각의 상태에서 요정과 대화를 하고 선지 같은 토마토와 원형 정제를 게워낸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다. 그는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내 책상에 이 시를 놓고 갔다. 당장 구기거나 찢어버릴 수도 있었는데 지윤이는 초록색 파일 두 번째 페이지에 시를 끼워 넣었다. 수십 년 세월이 지나 버릴 만도 한데 모서리가 누렇게 변한 채 그 자리에 있다. 수백 번 시를 읽다 보니 제 멋대로 행을 맞춰 새로운 문장이 만들어졌다.
"네가 나를 파멸시킨다 할지라도 나는 네게서 몸을 뺄 수 없으리."
"나 너를 사랑하노라, 수수께끼의 삶이여."
"아빠, 도꾸랑 같이 쉬고 있어?"
스물두 살이 된 나는 아버지와 도꾸가 잠든 자작나무 앞에 서 있다. 아버지는 도꾸가 걸음이 빨라 먼저 마을 불빛에 도착한 것이라 말했었지만, 본인도 도꾸 못지않게 발걸음이 무척이나 빨랐다.
아버지가 좋아했던 초록병 소주를 나무뿌리에 붓는다. 투명한 액체가 하얀 바닥에 스며들며 옅은 구멍이 생겼다. 잔을 기울여 남아있는 알코올을 수액처럼 몸 안에 흘렸다. 지윤이는 혈이 데워진 몸을 나무에 기대어 체온을 나눈다.
"생명의 건전지가 다할 때까지 그저 사는 것이다."
"아빠도 나무가 되었으니 나를 지켜보고 있겠지. 내가 길을 잃지 않도록, 얼마나 많이 웃고 사랑하는지도 모두 보고 있겠지."
"나는 아빠가 가르쳐준 산책을 아주 천천히 즐기다 갈게. 소풍 온 아이처럼 세상을 둘러보고 행복을 발견할게."
아빠가 입은 하얀 외투 위로 바람이 지나가고 언젠가 기분 좋게 취해 부르던 그의 거나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