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유럽의 살롱을 매혹했던 왈츠처럼 봄날의 캠퍼스에도 거부할 수 없는 열기가 퍼져갑니다. 원을 그리며 맞닿는 궤도 속에서, 서로를 탐닉하는 감각의 향연이 지금 펼쳐집니다.>
"우리는 어느 별에서 함께 여기로 떨어진 걸까요?"
오후 3시의 캠퍼스는 과다 노출된 사진처럼 하얗게 번지고 있었다. 햇빛에 눌린 배경 사이로, 어디선가 경쾌한 삼박자의 리듬이 들려오는 듯했다. 착각이 만들어낸 우연인지, 어느 별에서 함께 이곳으로 떨어진 두 사람이 만들어낸 생의 박동인지 알 수 없었다.
소소리바람에 날려 어깨까지 늘어진 여자의 머릿결이 남자의 뺨을 스쳤다. 남자는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자의 손을 더 꽉 잡았다. 체온이 서로를 확인하는 가장 솔직한 언어처럼 느껴졌다. 남자의 팔이 여자를 가까이 끌어당길 때마다 두 사람의 공기는 진공 상태처럼 밀착됐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갓 베어낸 풀의 숨결과 익어가는 감귤 꽃의 잔상이 겹쳐 있었다. 풋사과처럼 아리고 맑은 향은 정오의 햇볕에 바삭하게 말린 솜이불처럼 포근했다. 그 냄새는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액체로 뿌려놓은 것 같았다.
'사랑학 개론' 강의실 문이 열렸을 때, 지윤은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습관처럼 노트를 펼쳐 놓았지만 아직 아무 글자도 적지 않은 상태였다. 강의계획서를 세 번째 읽고 있었고, 읽을수록 막연한 경계심이 생겼다. 사랑을 배우는 과목이라니.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굳이 아프지 않아도 되는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문이 다시 열렸다. 현수는 강의실을 한 번 둘러본 뒤 잠깐 주춤했다. 자리를 찾는 듯했지만 사실은 어디에 앉아야 할지 결정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결국 맨 뒷자리 벽 쪽에 앉았다. 가방에서 스케치북이 먼저 나왔고, 그 위에 펜이 가볍게 얹혔다. 강의가 시작되기 전까지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기다란 이어폰 줄을 통해 가사를 듣고 한 곳을 바라봤다.
교수는 사랑을 구조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친밀감, 열정, 헌신. 세 개의 꼭짓점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이 칠판 위에 그려졌다. 지윤은 그 도형을 따라 옮기며 사유했다. 저렇게 정확한 형태로 존재하는 감정이라면, 어쩌면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거라고.
뒤쪽 벽에 붙은 책상 위에서 검은 펜이 분주하게 선을 긋는다. 현수는 칠판에 그려진 삼각형 대신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닫히지 않은 선이 천천히 원을 그리다 다시 어긋난 채 이어졌다. 잠시 후 그의 펜이 멈췄다. 스케치북 한 장을 조용히 찢어낸다. 종이 위에 눈 한 쌍이 말갛게 떠올랐다. 하얀 바탕, 검은 눈이 지윤의 책상 위에 놓였다.
그가 나에게 '눈'을 주었다. 설명도, 이유도 없었다. 그날 이후 두 사람은 몇 번이나 같은 강의실 문을 함께 통과했다. 약속한 적은 없지만 발걸음의 속도가 닮아갔다. 서로의 템포가 합주처럼 잦아들었다. 완벽하지 않아 결대로 맞물렸다. 새초롬한 일렁임 속에 싹이 트는 초록 봄이 시작되었다.
현수는 지윤의 웃는 얼굴을 망막에 담아낸다. 안경 너머로 번진 빛 때문에 눈동자가 더 깊어 보였다. 지윤은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시선이 따뜻해서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명주바람에 밀린 흑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시야를 넘나 든다.
그가 눈길이 닿는 곳에 손을 대어 흩날리는 가닥을 그녀의 귀 뒤로 넘긴다. 지윤의 몸이 움찔거렸다. 둘 사이의 거리가 한 뼘으로 줄어든다. 농도는 짙어지고 열기가 더해간다. 햇빛이 산 뒤로 기울고 풀벌레 소리가 하나둘 깨어날 때까지, 서로의 온도를 확인했다.
"오오 눈부시다. 자연의 빛. 해는 빛나고 들은 웃는다."
괴테의 시구처럼, 세상은 나뭇가지마다 피어나는 너라는 꽃으로 가득하다. 종달새가 노래와 산들바람을, 꽃이 향긋한 공기를 사랑하듯이 나의 세계는 오직 너로 채워진다. 반짝이는 네 눈동자 앞에 뜨거운 피는 고동치고, 너는 내게 청춘과 기쁨과 용기가 된다. 노래와 춤이 이끄는 이 눈부신 시절 속에서, 그대도 부디 영원히 행복하기를.
"나는 나를 만지지 않고, 살고 있었구나."
이 문장은 갑작스럽게 떠올랐지만 오래전부터 내 안에 고여 있던 것 같다.
나는 거울을 보지 않는다. 거울이 나를 본다. 매끈한 유리 뒤편에서 무언가가 나를 응시한다. 나는 들키지 않으려 더 단정해진다. 더 정확해진다. 더 완벽해진다.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 관리'라 부르지만, 내게 그것은 장식이 아니라 내면의 붕괴를 늦추는 방식에 가까웠다.
전시장 철수 마지막 날이었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뒤, 넓은 공간에는 먼지 냄새와 금속 잔향만이 희미하게 떠돌았다. 현수는 마지막 케이블을 감아 사다리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이 손끝에서부터 서서히 풀렸다. 지면을 디딘 그의 다리에는 피로함과 동시에, 작업을 마무리한 사람만이 갖는 단단함이 남아 있다.
미애는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듯 기척 없이 고요하다. 그가 바닥을 내디뎠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다만 서로가 서로의 앞을 가로막고 있다.
아빠는 내 인생의 첫 전시였다. 관객은 나뿐이었고, 전시는 부엌 바닥에서 끝났다. 열여덟 살 봄. 낮게 엎드린 아빠의 몸. 텅 빈 농약병. 그 이후 내 삶은 언제나 전시 준비 상태였다. 조명은 과하게, 그림자는 최소로. 그러던 어느 날 완벽하게 숨겨진 내 세계에 낯선 손이 들어왔다. 그 손은 보이지 않는 것을 고정시키는 손이었다.
너는 그의 손을 본다. 접착제가 굳어 하얗게 갈라진 마디, 굳은살이 박여 두꺼워진 피부 위에는 무언가를 오래 붙잡고 버텨온 흔적들이 쌓여 있다. 그 손이 네 허공 앞에서 멈춘다. 미처 연결되지 않았으나 너는 안다. 지금 이 거리, 지금 이 정지는 너를 부르고 있다. 각자의 삶을 지켜온 이들이 예의를 갖춰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녀가 한 걸음 다가간다. 뭉툭한 굽 소리에 대리석 바닥이 얇게 울린다. 그는 박제된 듯 서있다. 그녀가 그의 팔에 손을 올린다. 섬세한 손가락과 거친 아귀, 이질적인 두 표면이 처음으로 맞닿는다. 그녀의 손바닥에 그의 온기가 내려앉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네 이마까지 다가온다. 서로의 호흡이 부딪히며 미묘한 온도차가 사라진다.
아직 입술은 닿지 않았다. 네가 한 번 더 호흡을 들이쉴 때 그의 숨이 네 안으로 섞여든다. 그녀가 눈을 감는다. 한 번 새겨지면 지워지지 않는 압력. 그녀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쥔다. 놓치지 않겠다는 신호.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그녀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이 서로를 통해 자신을 만지고 있었다.
전시장에 남아 있던 차가운 기류 안에서 두 사람만 데워졌다. 누군가 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단지 서 있는 두 사람. 그들 안에서는 오랫동안 고정되어 있던 구조 위에 새로운 뼈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서로의 몸으로 이어졌다.
인사동 골목은 서서히 예전의 속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유리문에 붙어 있던 코로나 안내문들이 하나둘 떼어지고, 거리에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기색이 남아 있다. 약한 소독약 냄새와 오래된 나무 먼지가 뒤섞인 전시장 안. 그가 수평계를 올려두고 신중하게 조절하던 철제 프레임이 벽에 기대어 있다.
눈이 녹는 하얀 봄이 시작되었다. 그의 작업복에 박힌 거친 금속 가루와 미애의 셔츠에 남은 섬유유연제 향기가 서로의 표면에 스며들었다. 미애는 그의 등을 따라 흘러내린 땀이 천천히 말라가는 자국을 지켜본다.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지만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예전엔 직접 그렸어요."
그가 수평 패드를 누르던 손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마치 질문을 듣기 전부터 대답을 준비한 사람처럼.
그녀는 질문을 아꼈다. 왜 그만두었는지, 언제 방향이 바뀌었는지 묻지 않았다. 어떤 꿈들은 망가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접히기도 한다는 걸 미애는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지 않은 간극이 있었고 그 여백은 살아있는 것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물음을 아꼈다. 이상형을 묻지 않았고, 나의 어떤 점을 좋아하는지도 캐묻지 않았다. 말을 꺼낼수록 수직과 수평이 맞물린 이 공간이 어긋날 것만 같았다. 설명되지 않은 함축은 두 사람 사이를 메우는 하나의 밀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완벽한 것은 죽은 것이고,
살아있는 것은 흔들린다."
완벽한 균형을 맞추려 애쓰던 그의 손끝은 결국 미세하게 떨렸고, 빈틈없이 의미를 붙잡으려던 그녀의 눈빛에도 균열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틈과 금은 무너짐이 아니었다. 서로가 살아 있음을 드러내고, 멈추지 않고 적응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모든 생명은 흔들림 속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한다.
'서로 사랑하면 언제라도 봄'이라고 했던가.
춤추듯 흔들리던 시간 끝에 꽃이 피는 분홍 봄이 오고, 우리는 다시금 ‘봄의 서곡’의 막을 올렸다.
눈이 녹는 하얀 봄,
싹이 트는 초록 봄,
꽃이 피는 분홍 봄,
<완벽을 향해 질주하던 단조로운 4/4박자 대신, 흔들림이 스며든 3/4박자가 우리의 시간을 채웁니다. 마침표를 찍지 않기에 끝없이 흐를 수 있는 이 미완의 예술 속에서, 당신과 나의 봄이 다시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