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원 옆 미술관

by dropfairy

"사나운 초식동물이 있어?"

풀만 먹어 온순하기 그지없을 것 같은 초식동물 중에 살벌한 맹수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코끼리? 코뿔소? 가장 위험한 초식동물이 뭐야?" 재차 묻자 현수가 답한다.


"아마도 하마?"


"하마는 잡식 아니야? 하마가 풀만 먹는다고?" 믿기지 않는 듯 물음표를 던지던 그녀가 잠시 검색을 마친 후 말한다.


"하마가 초식이었어. 위험한 하마가 초식이라니..."




지윤은 동물원 난간에 팔꿈치를 얹고, 옆에 선 여덟 살 아들에게 물었다.
"저 동물, 어떤 것 같니?"


진우는 얼마간 연못을 들여다보다 답했다.
"착해 보여."


지윤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맞아. 풀만 먹는 초식동물이야."


수면 아래의 거구는 거의 움직임이 없었다. 평온한 물결 위로 둥근 콧구멍만 내놓은 채 느릿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데, 세상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다치게 하는 동물 중 하나가 저 녀석이래."


아들의 눈이 동그랗게 말려 올라갔다.
"왜?"


지윤은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말했다.

"하마는 자기 공간에 누가 들어오는 걸 싫어해. 평소엔 얌전해 보여도 선을 넘으면 갑자기 화낼 수 있어."


말이 끝나자 물 위에 떠있던 덩치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분홍빛 속살이 동굴처럼 활짝 열렸다가 이내 닫혔다.


진우가 엄마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럼 엄청 무서한 동물이네."


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자기 자리를 지키려는 것뿐이야."





미애는 동물원 옆 미술관으로 발령을 받았을 때 위치를 먼저 확인했다. 지도 앱에는 연못이 파란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옆에 있는 미술관은 회색 사각형이었다. 색이 겹치지 않는 배치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전시장의 밝기를 미세하게 조절한다. 빛이 너무 매끄러우면 관람객의 모습이 비쳐 작품을 가린다. 반 발짝 물러서 보니 거슬리던 음영이 사라지고 작품 고유의 질감이 눈에 들어왔다. 에 끼웠던 브로슈어를 내려놓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바깥 소음이 벽을 울리는 동안, 개장을 앞둔 공간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설치팀이 들어왔다. 금속 케이스를 밀던 현수의 손목에 긁힌 상처가 보였다. 장갑을 벗자 테이프 자국이 하게 남아 있다. 그는 수평계를 들어 올려 각도를 맞췄다. 중심이 맞자 긴장이 풀린 듯 윗몸이 천천히 내려왔다. 적막지속되고 담장 건너편에선 나른한 파문이 번진다.


두 사람은 미술관 뒤 울타리를 따라 오밀조밀 난 길을 걸었다. 동물원 담장은 미술관 마당과 맞닿아 있었다. 널찍한 돌 위를 지나자 안내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풀잎 그림 아래 짧은 글자가 적혀 있다. '초식.' 단어는 순해 보였지만, 안쪽에서는 원통형 몸이 뒤척일 때마다 표면이 거칠게 흔들렸다. 폐장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띄엄띄엄 흐르고, 발걸음 소리도 점점 드물어졌다.





아이는 엄마의 엄지손가락을 붙잡은 채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코끼리와 코뿔소 우리를 지나면서도 시선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거대한 몸이 마른풀을 씹어 넘기는 장면이 단조롭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아이 손끝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 엄마 손바닥으로 스며든다.


하마 우리 앞에 멈춰 서자 엄마의 눈빛이 고였다. 물살을 가르며 솟아오른 등은 잠긴 바위의 일부처럼 보였다. 물을 머금은 둥근 몸은 막 씻어낸 채소처럼 생기가 돌았고, 두꺼운 피부는 미끄럽게 번들거렸다. 오래 눌러 두었던 기억이 얇은 막처럼 떠올랐다. 깨어나는 감각이 지윤의 의식을 조용히 밀어 올렸다. 학생 식당 맞은편에서 샐러드를 뒤적이던 현수의 윤곽이 드러나고 흐릿했던 대화가 점차 선명해진다.


"나는 온순한 초식동물이야."

채식주의자였던 엄마가 스스로를 정의하며 내뱉은 말이었다.


"초식동물이 온순하다고? 사나운 초식동물도 있어."

초식동물처럼 샐러드를 씹는 지윤의 입가를 보며 현수가 웃듯 덧붙였다.


"사나운 초식동물이 뭔데? 코끼리? 아니면 코뿔소? 네가 아는 가장 위험한 초식동물은 뭐야?"


장난처럼 던진 말에 현수가 순간 말을 삼키고 가라앉은 음성으로 답했다.

"하마."


하마는 겉보기에 둔하고 온순해 보이지. 하지만 자기 영역이 침범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그 어떤 육식동물보다 잔인해져. 부드러워 보이는 그 입으로 사람 몸을 단번에 으스러뜨릴 수도 있어.


지윤은 스스로를 온순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다. 다만, 지켜야 할 선 앞에서는 오래 잠겼다.






"사나운 초식동물이 있어?"


소리가 떨어진다. 파장이 퍼지고 냄새가 물에 닿는다. 수면이 먼저 반응한다. 나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위에서 내려온 떨림은 얕다. 슬쩍 건드렸다 금세 사라진다. 방향이 기울면 거리가 좁아졌다는 뜻이다. 앞발을 들어 진흙을 누른다. 바닥이 늦게 밀린다. 몸을 조금 들자 물이 어깨를 따라 갈라진다. 등줄기가 밖에 닿는다. 콧구멍이 열리고 숨이 터진다. 물방울이 굵게 튕겨 나간다. 느림은 안전을 만든다. 아직 반응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도 하마?"


다른 파동이 겹친다. 이전보다 낮고 무겁다. 귀가 저절로 쏠린다. 의미는 알지 못한다. 대신 높낮이와 간격, 반복되는 박자를 기억한다. 위쪽에서 빠른 움직임과 발소리가 겹친다. 턱이 벌어진다. 이빨이 드러난다. 입 안으로 물살이 밀려든다. 액체가 목 아래로 몸을 눌러 담근다. 위쪽은 가볍고 아래는 단단하다. 이 깊이는 익숙하다. 오래 머물 수 있다.




퇴근길, 담장 옆으로 두 개의 그림자가 길어진다. 겹치지 않게 평행을 만들었다. 경계는 대개 이런 모습이다. 닿지 않음으로 유지되고 넘지 않음으로 또렷해진다.

오후의 햇빛이 연못 위로 기울어질 무렵, 동물원 통로 끝에서 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지윤이 아들의 손을 잡고 난간 앞에 서 있다. 아이가 물 밑을 살피며 물었다.


"엄마, 하마는 왜 안 보여?"


지윤은 잠시 바라보다 대답했다.
"보이지 않아도 거기 있어."


그때, 연못 반대편에서 미애와 현수가 걸음을 멈췄다. 네 사람의 낯이 같은 곳에 머물렀다.


진우는 연못을 훑고 있다. 물속에 잠긴 몸통은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고, 눈과 귀만 밖에 떠 있다.


"엄마, 하마는 왜 물에 숨어 있어?"


"하마는 대부분 물속에 살아. 몸이 마르면 오래 못 살거든."

지윤이 나직하게 말했다.


진우가 천진하게 묻는다.
"그럼 숨으려고 들어가는 거야?"

"살려고 들어가는 거야."


엄마의 말에 아이의 눈이 잠깐 반짝였다.


잠겨 있던 형체가 더디게 수면에 드러난다. 네 사람 모두 같은 장면을 보고 있었지만 마음이 향하는 곳은 서로 달랐다. 누군가는 오래 벌어진 간격을 떠올렸고, 누군가는 가까스로 지켜 온 선을 더듬었다. 또 다른 이는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기척과 모호한 추억을 따라갔다. 묵직한 그림자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물결이 잦아들 무렵에야 깨달았다. 우리는 대개 보이는 순간에 도착하지만, 마음과 관계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시작한다.


연못 건너, 네 사람 사이의 간격은 물결 하나 정도였다. 햇빛이 수면 위에서 부서지며 서로의 윤곽을 흐렸다. 지윤은 아이의 손을 잡고 멈춰 섰다. 미애의 시야가 잠깐 머물다 조용히 흩어졌다. 아이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던 손, 난간을 짚은 손끝의 각도, 빛에 스쳤다 숨은 옆얼굴. 현수의 눈길이 멎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전시는 늘 제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담장 너머 커다란 몸짓은 보이지 않는 규칙을 지켰다. 보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보이지 않는 것에 닿았다.


현수는 움직이지 않았다. 떠오르는 무언가를 붙잡지 못한 사람처럼. 건너편에서 아이가 웃었다. 지윤이 몸을 낮춰 아이의 말을 들었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