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프 하나가 탁자 위에 놓여 있다. 표면에 눌린 영문은 빛을 잃은 별자리처럼 색이 바랬다. Tekapo.
어릴 적, 밤이 길어지면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읽어주곤 했다. 목동, 잠든 아가씨,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는 문장. 그 문장을 놓칠까 봐 책장은 늘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그의 방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많았다. 책상 모서리, 이불의 각, 컵 손잡이의 방향. 재난 같은 시절이 지나간 뒤부터 그는 자를 든 사람처럼 모든 것의 자리를 맞췄다. 한 번 뒤틀린 열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몸으로 배웠기 때문이다. 그는 줄을 세웠고 그 끝은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처럼 아슬했다.
그날 호수의 밤은 달랐다. 물 위로 쏟아진 빛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은하는 찬찬히 흘렀다. 나뭇잎은 잔물결을 건드렸고, 창에는 예고 없이 점들이 번졌다. 그는 그 풍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제자리를 벗어나 흩어지는 것들이 또 다른 질서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던 밤이었다.
지윤은 검은 타래의 둥근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더듬는다. 굳어버린 테이프 바퀴는 잠잠하다. 한때는 일정한 간격으로 숨을 쉬듯 돌아가던 것인데, 멈춘 지금은 파도 직전의 수면처럼 정적만 감돈다. 창밖에는 겨울빛이 얇게 깔려 있다.
서랍을 연다. 안쪽에는 테두리가 변한 책 한 권이 있다. 닳은 페이지 사이에 뉴질랜드의 깊은 호숫가에서 만난 밤이 잠들어 있다. 별을 세던 그는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그 밤을 통째로 품었다.
테이프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지듯 내려온다. 스르르 서랍이 닫힌다. 창문 밖 하늘은 흐리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멀리, 더 오래 머문다.
내 인생은 사건 위주다.
열다섯, 아버지 조기 퇴장.
스물다섯, 오빠 중도 하차.
"나 중2 때 아빠가 돌아가셨어."
지윤은 커피를 젓다가 멈춘다. 컵 안에서 갈색 소용돌이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춘기랑 장례식이 같은 해에 오면 사람이 좀 이상해져. 울어야 할지, 방문을 쾅 닫아야 할지 헷갈리거든."
그녀의 얘기에 동갑인 그가 고개를 끄덕인다.
"중2면... 한창 예민할 때네."
"응. 세상이 나를 공격한다고 믿었지. 근데 실제로 한 대 치고 가더라."
그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버텼어?"
"버틴 건 아니고, 조정했어. 문제 안 만드는 쪽으로."
"편하겠다."
지윤이 눈을 치켜뜬다.
"누가?"
"주변 사람들.”
지윤이 피식 웃는다.
"오빠는 내가 스물다섯에 죽었어."
말이 공기 속에 잠시 걸린다. 이번에는 그녀의 손이 멈추지 않는다.
빛의 파편이 길을 터 준 테카포 하늘 아래, 오빠는 렌터카를 몰았다. 그는 별을 보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돌아오지 않았다. 현지 보고서는 단정했다.
"야간 주행 중 운전미숙으로 가드레일 충돌. 차량 추락."
문장은 매끈했고, 설명은 짧았다.
사고 차량의 오디오가 특정 구간에서 멈춰 있었다. 베토벤도, 모차르트도 아니었다. C-G-C. 일정 간격으로 반복되는 화음. 음악이라기보다 박자에 가까운 소리.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녹음해 둔 리듬 같았다.
군 복무 이후 그의 청각은 예민해졌다. 큰 소리는 오래 남았고, 멈춘 뒤의 침묵은 더 길게 이어졌다. 그는 소음을 줄이기보다 배치를 바꾸는 쪽을 택했다. 집 안의 각도, 말의 높낮이, 웃는 시점까지 고쳐 놓았다. 지윤은 그 배열 안에서 자랐다. 행동은 점검받았고 감정은 검열되었다. 그의 기준은 단호했고 둘은 자주 어긋났다.
테카포의 밤은 예측 불가였다. 바람은 방향을 바꾸고, 물결이 계산을 밀어냈다. 빗방울은 제 간격을 지키지 않았다. 렌터카 블랙박스 영상에는 별이 찍히지 않았다. 대신 갑자기 사라지는 도로 표지판의 반사광이 남아 있었다. 가드레일이 꺾인 지점은 완만한 커브였다. 과속 기록은 없었다. 브레이크 흔적도 거의 없었다. 이상하게도, 마지막 30초의 음성 파일만 손상돼 있었다.
지윤은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테이프를 재생하면, 처음엔 단조로운 화음이 흐른다. 단단하고 고른 박자.
그러다 아주 미세하게, 틈이 생긴다. 0.1초쯤 늦는 음. 그리고 다시 맞춰지는 박자.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윤은 늘 그 부분에서 멈춘다.
소리가 조금씩 얇아진다. 음이라기보다 공기에 가깝다.
창문이 열린 듯한 기압의 흔들림. 그 위에 설명하기 어려운 낮은 진동이 겹친다. 충돌음은 없다. 비명도 없다. 그리고 정확히 그다음 구간, 마지막 30초가 비어 있다. 파일은 거기서 끊긴다.
오빠에게 세상은 두 종류였다. 자신이 통제하는 설계도 속 세상과 예기치 못한 소음으로 채워진 세상. 그 밤, 테카포의 천정은 너무 넓었고 별은 흔들렸다. 누군가는 운전 미숙이라 적었지만 지윤은 마지막 음의 불일치를 기억한다.
그는 브레이크를 밟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끝내 맞출 수 없는 박자를 들었던 걸까. 테이프는 멈춘 채 돌아가지 않는다. 멈춘 건 기계가 아니라, 오빠의 리듬이었다.
"오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지윤은 잠깐 숨을 들이쉰다.
"통제형. 본인이 맞아봐서 상대방을 구속해야 안 불안한 타입. 나를 제일 많이 관리했지."
"관리?"
"행동, 옷, 말투. 전부 체크했어."
남자는 커피잔을 내려놓는다.
"그래서 지금도 누가 참견하면 싫어?"
"응. 특히 동갑이면 더."
"다행이네. 난 간섭 잘 안 해."
"왜?"
"나이도 같은데 가르칠 명분이 없잖아."
지윤은 그 말이 좋다. 위도 아래도 아닌 옆. 평행선처럼 나란한 위치.
"근데 웃긴 건, "
지윤이 말을 잇는다.
"상실을 두 번 겪고 나니까, 사람이 오래 있을 거라는 말을 못 믿겠어. 다들 중간에 퇴장하더라고."
그는 잠깐 생각한다.
"그럼 나는? 나도 중도 하차할 것 같아?"
지윤은 말없이 시선을 흘려보낸다.
"동갑은 통계적으로 위험해. 같이 늙으니까."
침묵을 중단한 그녀가 다시 말한다.
"그럼 같이 끝까지 갈 확률도 높은 거 아냐?"
그의 물음에 그녀가 되묻는다.
"누가 떠난다는 소리를 들으면 겁 안 나?"
그가 천천히 입을 연다.
"오래 있고 싶어 져."
"책임감 과잉이네."
"아니. 경쟁."
"누구랑?"
"네 과거랑."
지윤의 눈매가 잘게 휘어진다.
그는 '영원'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지금'을 조금 더 늘인다.
"나는 급하게 안 사라져. 동갑이라 속도 맞추기 편하잖아."
그 말은 안정적이다. 끌어올리지도, 끌어내리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도망갈까 봐 먼저 밀어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네 인생의 사건들이 조기 종영이면 나는 몇 화짜리야?"
남자가 묻는다.
지윤이 장난스레 답한다.
"본방송이 시작되기 전에 스쳐 가는 예고편?"
넌지시 그가 뒤집는다.
"시즌제 가자.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오래전 목동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던 가장 귀한 별 하나처럼 남자의 고백이 여자의 마음 위로 지그시 내려앉았다.
지윤이 연재하는 페이지 위에 비중 있는 인물이 등장했다. 최종회가 자꾸 미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