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근한 화요일, 내 과거가 우편함에 도착했다."
미애야.
오랜만에 네 이름을 종이에 적어 본다.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맴도는 이름이 있다는 걸, 나는 아직 배워 가는 중이야.
지난가을, 동물원 연못가에서 현수 씨와 나란히 걷던 너를 멀리서 보았어. 늘어진 버드나무 사이로 비친 네 모습이 고등학교 졸업식 날과 꼭 닮아 있더라. 그리고 네 곁에서 물결을 바라보던 남자. 세월이 덧칠해졌어도 나는 단번에 알아봤어.
우리 사이가 멀어진 날이 지금도 또렷하다. 네가 이사를 준비하던 뜨겁던 오후였지. 상자 곁에 쌓인 옷과 공책, 공연 전단이 방바닥을 어지럽히고 있었어. 짐을 정리하던 네 손에서 떨어진 작은 사진 한 장을 내가 집어 들었지. 학교 축제 때 찍은, 환하게 웃고 있던 얼굴. 그 기억 속에는 나도 있었지만 사진에는 그 사람만 남아 있었어. 한쪽은 반듯하게 잘려 있었고 종이 끝은 매끈했지. 결심하고 도려낸 흔적처럼 보였어.
나는 쉽게 단정했고 너는 해명하지 않았지. 네가 그에게 다가간 적도 없고 현수 씨와 너는 만난 적도 없었어. 이제 와 곱씹어 보니, 너는 단지 한 장의 인화지 안에서만 위치를 바꾸어 두었을 뿐이었겠지. 누군가를 빼앗으려는 행동이 아니라 닿지 못할 감정을 조용히 갈무리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르겠어. 그걸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어.
정인이를 통해 네가 미술관에서 일한다는 소식을 들었어. 액자 속 그림을 오래 바라보는 일이라지. 어쩐지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너는 서둘러 지우기보다 한 번 더 들여다보는 쪽이니까.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것을 알아보는 사람이라는 걸,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알 것 같아.
그날 연못가에서 본 너는 예전보다 단단하고 편안해 보였어. 물가에 스미는 바람처럼 잔잔했지. 그 모습이 참 좋더라. 솔직히 말하면 나는 오랫동안 나만 상처 입었다고 여겨 왔어. 그런데 시간을 건너 돌아보니, 우리 둘 다 서툴렀던 것 같아.
이 편지가 늦은 인사처럼 도착해도 괜찮겠지?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다른 계절을 건너왔지만 함께 보낸 시간까지 사라진 건 아니니까.
네 하루가 평온하길, 스스로 지켜온 순간들 곁에 끝내 설 수 있기를. 그 시간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지 않아도 되기를, 거기 있는 것만으로 오롯해지기를.
지윤이가.
나에게는 태어나지 못한 이름 하나가 있었다. 병실 형광등 아래, 동의서에 서명을 한 사람은 남편이 아니었다. 보호자란 칸 옆에 적힌 이름은 '이현수'였다. 그때 우리는 이미 연인이 아니었지만, 연락을 받고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지켰던 사람이 그였다. 그 사람은 아이의 아버지가 아니었고 그저 한 번 가라앉는 무게를 함께 버텨 준 사람이었다.
"괜찮을 거야."
내 손등을 감싼 그의 손끝은 가늘게 떨렸다. 애써 고른 숨결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나는 그 흔들림 앞에서 아무 말도 보태지 못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가까워지지도, 완전히 멀어지지도 못한 채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상대를 살폈다. 조심스러움이 늘었고, 표현하지 못한 감정은 말 대신 긴 정적 속에 머물렀다.
수술실 문이 닫히는 순간, 이상하게도 열다섯 살 때의 숲이 겹쳐졌다. 가루처럼 부서지던 햇살과 바람에 일렁이던 나뭇잎들. 그때의 나는 잃는 일이 두려워 무엇이든 놓치지 않으려 했고 곁에 있는 이를 끝까지 붙잡으려 했다.
한때는 헤어짐을 끝이라고 믿었다. 마음이 식으면 관계도 함께 사라진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지나온 시간을 더듬어보니 꼭 그렇지는 않았다. 진심으로 마주했던 사이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도 함께 건너온 시간이 가라앉아 있다. 형태를 달리해 남고, 거리만 달라질 뿐 어딘가에 스며 있었다.
“야, 그냥 먼저 둘이라도 찍자.”
단발머리가 카메라를 들고 말했다.
“우리 같이 나온 사진이 없어.”
긴 머리가 말하자 단발머리가 주변을 둘러본다.
목에 카메라를 맨 남자를 발견했다.
“저분한테 부탁해 볼까?”
긴 머리가 잠깐 망설이다가 다가갔다.
“저기요, 죄송한데 사진 한 장만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카메라를 맨 남자가 부드럽게 응수한다.
“네.”
단발머리와 긴 머리가 나란히 서며 낄낄댄다.
“웃어. 이상하게 굳지 말고.”
“조금만 더 가까이 서 보실래요?”
남자의 말에 둘은 어깨를 더 붙였다. 셔터 소리가 바람에 묻혔다.
“감사합니다.”
긴 머리가 카메라를 받아 들었다.
남자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덧붙였다.
“혹시 괜찮으시면, 제 카메라로도 한 장 찍어도 될까요? 뒷모습으로요.”
단발머리가 눈을 크게 떴다.
“얼굴 말고요?”
“오늘 바다가 좋아서요. 두 분이 서 계신 선이 예뻐 보여서요.”
남자의 말이 느릿느릿 여백을 만든다.
긴 머리가 단발머리를 바라봤다.
“어때?”
단발머리가 가볍게 까닥인다.
“뭐, 바다 보러 온 거니까.”
둘은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너네 맞지?”
정인이가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지윤의 시선이 종이 위에 꽂힌다.
“이걸… 어디서?”
“내 남자친구 작업실.”
공기가 잠시 비어 있다.
“바닷가에서 내가 먼저 올라온 날, 기억나?”
정인이가 사진을 손끝으로 밀어 보인다.
“그날 너희 찍어준 사람. 카메라 매고 있던 그 사람.”
지윤의 눈가가 희미하게 흔들린다.
“그가 그날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래.”
정인이는 덤덤하게 지윤의 눈을 쳐다본다.
“너희를 찍고 돌아오다 나를 태워줬고, 그때부터였대.”
말은 여기서 멈춘다. 사진 속 두 사람은 등을 보인 채 서 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의 시작이 되는 순간을 지나고 있다.
소나무가 바다 쪽으로 길게 몸을 뻗고 있었다. 바람이 가지 끝을 스치고 지나가자, 아래에서는 물살이 바위를 감싸며 흰 선을 그렸다. 그는 수평선을 프레임 위쪽에 두고, 휘어진 나무 몸통을 화면 한쪽에 걸어 둔다. 곧은 것과 굽은 것이 함께 있어야 장면이 단단해진다.
긴 머리의 여학생은 난간에 가볍게 기대 서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를 넘어 흘러내린다. 옆의 단발머리 여학생은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다가, 긴 머리가 얼굴을 가릴 때면 무심한 듯 손을 들어 정리해 준다. 손길은 짧고, 표정은 담담하다. 대신 정리된 머리카락 끝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는다.
“조금만 고개를 들어볼까요?”
그가 말하자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시선을 바다 쪽으로 옮긴다. 맞춰본 적이 없을 텐데 호흡이 비슷하다. 난간 아래에서 파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부딪치며 원을 만들고 흩어진다.
그는 셔터를 누르기 전 잠시 기다린다. 긴 머리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기울고, 단발머리의 팔꿈치가 그 기울기를 받아낸다. 의식적인 배려라기보다 이미 몸에 밴 동작에 가깝다.
찰칵. 순간이 필름 위에 얇게 눌린다. 얼굴은 또렷하지 않아도 좋다. 같은 방향을 향한 발끝, 바람을 나란히 견디는 등, 말이 없어도 이어져 있는 간격이면 그걸로 된다.
그는 카메라를 내리며 두 사람을 한 번 더 본다. 웃음이 과하지 않고, 포즈가 의도되지 않은 나이.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시간의 결이 그대로 드러난다.
미술관 우편함에서 꺼낸 편지봉투 속에는 사진 한 장이 함께 있었다.
손바닥 위에 올려진 작은 자투리는 색을 입힌 것도 완전히 빛을 지운 것도 아닌 세월에 그을려 누렇게 바랜 빛을 띤다. 고개를 들어 텅 빈 전시실을 바라본다. 벽을 채운 화려한 그림들보다 내 손에 들린 이 조각 하나가 더 크게 마음을 눌러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