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을 말하다,

by dropfairy

"선생님, 첫사랑 이야기해 주세요!"


3교시 시작종이 울리자 교실 뒤편에서 장난 섞인 외침이 날아왔다. 예상했다는 듯 학생들이 입을 모아 호응한다. 출석부를 덮고 교탁 건너로 얼굴을 훑었다. 아이들 입가에는 감출 수 없는 웃음기가 실룩거리고 있었다.


"얘들아, 진정해. 애석하게도 선생님 첫사랑은 시험에 안 나와. 오늘 진도는 비문학이야. 수필은 다음 주에나 기대해 봐."

말을 돌려도 왁자지껄한 아우성은 물러날 기색이 없다. 눈동자 속에 가득 찬 호기심이, 아득했던 한 때의 문장을 기어코 끄집어낸다.






졸업식 꽃다발이 무릎 위에서 눌려 있었다. 5·18 묘역을 등진 차체는 숨을 참듯 창을 닫아걸고 속도를 냈다. 차창 너머의 소음은 차단된 채, 바닥을 치는 기계음이 실내를 메웠다.

정인은 맨 뒷자리 창에 이마를 기댄다. 광주는 그대로인데, 자기만 남겨지는 기분이 들었다. 지윤과 미애는 서울로 올라간다.


15번 시내버스가 말바우시장을 지나며 덜컹, 과속방지턱을 넘었다.

미애가 풍경을 쫓다가 말했다.
"우리, 이렇게 끝이야?"


지윤이 고개를 돌렸다.
"끝은 무슨."


"맨날 붙어 다녔잖아. 이제는 기차나 고속버스 타야 얼굴 보겠네."
입꼬리를 애써 올리는 정인의 얼굴이 유리에 비쳤다.


"반나절이면 돼. 마음만 먹으면 오지."

누가 입 밖으로 꺼낸 말인지, 속으로 웅얼거린 말인지 알 수 없다.


버스 안에서 히터 바람이 낮게 웅웅 울었다.


지윤이 툭 내뱉듯 말했다.
"우리 여행 한 번 가자."


"어디로?"

미애가 물었다.


정인이 이번엔 창밖 대신 두 사람을 봤다.

"바다 보러 가자."


지윤이 말을 얹었다.

"아까 거기서 나오는데 좀 이상했어. 우리는 이제 스무 살인데, 거긴 시간이 그대로잖아. 우리가 태어난 해에 멈춘 사람들."


미애가 억누르지 않고 더한다.
"그냥 헤어지기 싫어. 각자 자리로 가더라도, 한 번은 같이 멀리 가보고 싶어. 바다까지."


미소가 교차하고 셋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흩어지기 전에, 꼭."





그해 늦가을, 세 여대생이 여수행 버스에서 내렸다. 광주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하는 한 명과, 상경 후 내려온 미애와 지윤이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내가 먼저 물은 건 아니었다.


그날 정인은 친구들과 여행을 왔다가, 방파제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남자를 보았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부는 쪽으로 자꾸만 몸을 틀던 사람. 셔터를 누르는 손끝엔 망설임이 없었다.





밀려왔다 부서지는 파도 사이로 짧은 철컥거림이 섞여 들었다. 목에 카메라를 걸친 남자는 나란히 선 지윤과 미애의 뒷모습을 필름에 담았다.


"고맙습니다."

긴 머리와 단발머리에게 다가오는 여자를 지나치며 남자의 음성이 멀어진다.


스쳐가는 남자를 흘깃하던 여자가 지윤과 미애 앞에 섰다.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정인이 친구들에게 조심스럽게 말한다.


긴 머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묻는다.

"지금?"


"응. 집에 일이 생겨서. 버스 타면 될 것 같아."


단발머리가 정인의 손을 붙잡았다.

"같이 가줄까?"


여자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히 너희까지 움직이지 마. 금방 갈 수 있어."


"도착하면 연락해."

긴 머리가 말한다.


"응."

여자는 작게 웃어 보이고 보폭을 늘려 걷는다.






정류장 표지판 아래서 시간표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삼켰다. 버스 도착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때 차 한 대가 천천히 멈췄다. 창문이 내려간다.


"어디까지 가세요?"


기척을 기다리던 남자가 말을 이어간다.

"저는 광주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라서요. 괜찮으시면 태워드릴까요?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나는 잠시 차 안을 살폈다. 조수석에는 카메라 가방이 놓여 있고, 뒷좌석엔 삼각대가 기대어 있다. 낯선 사람이었지만, 사진을 찍고 있던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도착 시간표를 다시 보고, 휴대전화를 쥔 손을 고쳐 잡았다.
"광주까지 가세요?"


"네, 거기서 마저 찍어야 할 게 있어서요."


결심한 듯, 여자의 몸이 차 쪽으로 기울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타세요."


"감사합니다."


조수석 문이 닫히고 차가 출발했다. 차 안에는 라디오조차 켜져 있지 않았고, 그는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운전하는 남자의 윤곽과 빠르게 지나가는 전경을 번갈아 살피던 정인이 먼저 정적을 깼다.


"사진은 왜 찍으세요?"


남자는 운전대를 고쳐 잡고 한 호흡 뒤에 답한다.

"사라지는 걸, 붙잡고 싶어서요."


나는 창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기운 해의 붉은 기가 가라앉자 세상이 남색으로 짙어졌다. 쏟아진 먹물 속에 갇혀 그대로 멈춰있고 싶었다.


용봉동 학교 후문 교차로에서, 신호대기 중이던 남자가 말을 건넸다.

"아까 친구분들 찍힌 사진, 현상해서 보여드리고 싶어서요. 시간이 좀 걸릴 텐데, 나중에 다 되면 어디로 연락드리면 좋을까요?"


정인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명함 주시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거창한 고백도, 영화 같은 장면도 없었다. 안부 인사가 오고, 답장이 가고, 가끔 전시회에 들르고, 바다 대신 도시의 골목을 함께 걷게 되었다.




잎을 털어낸 가로수들이 서 있고, 바람은 막힘없이 곧게 달려왔다. 간판 모서리가 떨리고 낡은 창틀이 드르륵 댄다. 양림동 언덕 위, 붉은 벽돌이 바랜 건물 2층.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나무 발판이 낑낑거린다. 문을 열면 오래 묵은 종이와 금속성 현상액의 냄새가 새어 나온다.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인화 사진들이 빛을 받아 번들거린다. 정인은 올 때마다 벽면부터 쳐다본다. 매번 눈에 들어오는 게 달랐다.


여자가 코트를 벗는다. 손등까지 내려오는 긴 소매가 팔을 온전히 덮고 있다. 오늘은 사진 더미를 구경하다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매끈한 인화지가 옷자락에 쓸리며 미끄러진다. 거추장스러운 팔 끝을 밀어 올리고서야 사진을 집을 수 있었다. 드러난 여자의 살갗 위로 가늘고 옅은 선들이 그어져 있다. 아물었으나 완벽히 사라지지 않은 자국들. 남자의 시선이 여자의 팔목에 머물다 슬그머니 비껴갔다. 여자는 재빨리 소매를 끌어내렸다.


"빛이 강하면, 작은 흠집도 선명해져요."

창 밖을 보며 아무것도 보지 않은 듯 서있는 남자가 말한다.

정인은 숨 쉬는 법을 잊은 듯 정지해 있다.


"흠집이 남아도 사진을 버리진 않아요. 그때의 빛이 거기 있었던 거니까."

밖으로 향했던 남자의 표정이 안으로 돌아오고 그의 눈빛이 말을 한다.


남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는 들킨 것이 무섭지 않다.






"그래서요? 어떻게 됐어요?"

맨 앞줄 녀석이 호기롭게 묻는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 사람이 지금 선생님 남편일까? 아닐까?"


"말해주세요. 결혼하셨어요? 헤어지신 거예요?"

격양된 목소리가 화살처럼 쏟아진다.


"이야기니까, 결말은 열어둬야지."

가볍게 받아치며 돌아서 칠판을 지운다.


나는 출석부를 챙기다 잠시 손목을 내려다본다. 오래 전의 희미한 선들이,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창밖의 플라타너스가 바람에 다시 한번 기운다. 넘어질 듯, 그러나 끝내 서 있는 각도로.

어쩌면 사랑은, 누군가 내 흠집을 보고도 곁에 있어 주던 순간의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