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만화경

by dropfairy

비스듬히 기대앉은 여자
덧그린 옷 아래
지워지지 않은 연필선


한 손은

벗어 둔 장갑처럼

힘이 풀려 있고


다른 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한 채
조심스레 모여 있다.


얼굴에는
감정 대신

얇은 가면


조금만 기울어도
표정이
달라진다.


만화경 속에서
벗은 것과 걸친 것이
맞물려 겹치고


처음의 몸과
나중의 몸이
천천히 포개진다.






진우는 소파 귀퉁이에 몸을 둥글게 모으고 앉아 있었다. 손바닥으로 감싼 만화경이 아이의 눈가에 닿았다. 손목을 세워 눕히자 잠자던 파편들이 자리를 옮겼다. 파랑, 노랑, 붉은색들이 서로의 위치를 내어주며 겹겹이 꽃잎을 피웠다. 우연이 만든 정교한 짜임 앞에서 진우의 숨소리가 옅게 내려앉았다.


"엄마."

찻잔을 내려놓던 지윤이 고개를 돌린다. 잔에 남은 온기가 가느다란 김을 올린다.


"이거 봐요, 정말 예뻐요."

관 안에서 잠들어 있던 낱장들이 몸을 비비며 사르르 움직인다. 마른 모래알 같은 소리가 난다. 움츠렸던 알갱이가 섞이며 질서를 엮어간다. 결이 다른 새로운 우주가 열린다.


"아빠가 선물해 주신 거야."

어젯밤 장면이 밀려온다. 남편이 작은 상자를 식탁 위로 밀어 놓았다. 진우가 바로 뚜껑을 열어 보았다. 환한 조명 아래에서 은색 테두리를 두른 만화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번 돌려볼래?"

남편의 낮은말에 아이의 시선이 고정됐다. 진우가 만화경의 원통을 눈가에 가져다 댄다. 조심스레 손끝을 돌리자 앙다문 입술이 서서히 벌어진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세계를 마주한 것 같다.


지윤은 홀린 듯 그 광경을 건너다본다. 만화경 끝에서 볕이 반사되어 식탁 위로 부서진다. 잘게 쪼개진 색들이 서로 엉켜 대칭으로 갈라선다. 지윤의 머릿속에서 오래된 창문 하나가 열린다.






교실까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뒤에서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책상에 몸이 쏠린 미애가 가방 속으로 손을 넣는다. 차가운 플라스틱 질감이 걸린다. 아버지의 메마른 손등을 쓸어내릴 때처럼 까칠한 감촉이다. 만화경을 꺼내 손에 쥔다. 머지않아 이 찬란한 잔해도 납골당의 유리 벽 너머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삼촌이 검정 비닐봉지를 내밀었을 때, 안에는 여러 냄새가 고여 있었다. 퀴퀴한 차량 시트 냄새, 싸구려 방향제의 단내, 그리고 아버지의 생애에 문신처럼 배어 있던 담배 '88'의 찌든 내. 유품들 가운데 가장 이질적인 것은 동생이 초등학생 때 조립했던 장난감이었다.


미애는 잠깐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손님이 없는 택시 승강장에서 눈을 모아 들여다보았을 모습을 떠올린다. 동그란 물체를 돌릴 때마다 자국들이 흩어지고 다시 맞물렸을 것이다. 운전석에 구부정히 앉아 작은 구멍을 응시하는 아버지의 충혈된 눈이 어른거린다.


한 번 더 손목을 뒤틀었다. 미묘하게 타인의 영역을 파고들며 입체를 만든다. 팔처럼 갈라진 선, 허리처럼 잘록하게 파인 홈. 미애는 연습장 위에 연필을 움직인다. 연필심이 사각거리며 종이의 마른 입자를 긁어낸다. 목과 어깨, 팔. 끊기지 않은 선이 이어지며 여백 위로 사람의 윤곽이 차오른다. 허리와 배, 그리고 둔부까지.



"이게 뭐야?"

옆자리 정인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정인은 허리를 더 숙여 연습장 위의 선들을 훑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야 미쳤냐? 이거 나체 아냐?"


소란스러운 기척에 지윤이 다가와 물었다.
"누군데?"


"사람."

미애는 손가락 사이에서 연필을 한 번 굴리며 말했다.


정인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사람인 건 나도 알지. 그러니까 이 모델이 누구냐고."


미애가 만화경을 손등으로 툭 밀었다. 책상 위를 가로지르던 몸체가 흔들리다 멈췄다. 유리관 속이 다시 잦아들었다.

"그냥."


"그냥이 어딨어. 이거 너지?"
정인이 코를 살짝 구겼다.


미애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방금까지 연필을 놀리던 종이가 정인 쪽으로 조금 밀려 있다. 바탕 위에는 막 그린 여자가 기대어 있다.

"닮았어?"


정인은 그림과 미애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잠깐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옆으로 크게 흔든다.

"전혀."


교실 뒤쪽에서 의자 끌리는 소리가 지나간다. 순간 공백이 생긴다. 정인이 다시 묻는다.
"그럼 나야?"


미애는 대답 대신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준다. 백지 위, 무방비하게 드러나 있던 몸 위로 줄을 하나 더 긋는다. 어깨부터 시작된 얇은 선이 팔을 따라 내려와 허리 아래까지 덮는다.


정인이 어깨를 툭 친다.

"야, 너 지금 벗겼다가 다시 입히는 거냐?"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지윤은 아까부터 내가 건네준 만화경을 눈에 대고 있다.


"같은 조각인데, 계속 무늬가 바뀌네."

만화경을 찬찬히 돌리던 지윤이 중얼거린다.


지윤의 어깨너머로 정인이 가벼운 추임새를 넣는다.
"원래 그런 거잖아. 만화경은."


지윤은 눈을 떼고 종이 위 그림을 다시 본다. 어깨는 살짝 내려가 있고 시선은 갸우뚱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자세 같다.


"그럼 이 사람도, 계속 바뀌는 거야?"

지윤이 그림 속 커다란 눈을 지켜보며 묻는다.


미애가 연필을 내려놓았다.

"사람들 다, 괜찮은 얼굴 하나쯤 덧입고 살잖아. 그래서 가면처럼 그린 거야."


말이 떨어지자 교실 창쪽으로 바람이 한 번 스친다. 매일 같은 시각 택시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가던 아버지의 등이 겹친다.


지윤은 종이 귀퉁이를 잡고 있다.
"이거, 내가 가져가도 돼?"


미애는 대답 대신 연필을 다시 든다. 그림 아래 여백에 숫자를 적었다.

98. 3. 31


만화경 속 문양 하나가 그 날짜 아래 멈춘다.





신호등이 하나씩 깜박이며 비어 있는 교차로를 지킨다. 택시 한 대가 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다. 엔진은 꺼져 있고, 계기판만 희미하게 빛난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어깨가 조금 굽어 있다. 앞유리에 가로등 불빛이 번진다. 노란 실루엣이 유리 위에서 뾰족하게 늘어진다.


손바닥만 한 길이. 은색 종이가 군데군데 벗겨져 있고, 끝은 투명 테이프로 몇 번이나 감겨 있다. 남자가 그것을 집어 든다. 초록빛 눈금의 잔상이 만화경 안으로 스며든다. 유리 토막들이 촘촘한 자태를 만든다. 작은 구슬 하나가 중력을 따라 미끄러진다. 붉은 점이 틈 사이를 포물선으로 가로지른다.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향하던 정인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익숙하게 걸어가던 정인의 보폭이 살짝 어긋난다. 미애였다. 일 년에 서너 번, 안부조차 생략된 채 용건만 건조하게 오가던 이름. 정인은 숨을 느리게 뱉고는 메시지를 연다.


[전시 열어. 〈가면의 만화경〉 너랑 지윤, 둘 다 초대했어.]


며칠 전 지윤에게 미애 이야기를 꺼냈던 순간이 또렷이 떠올랐다. 미술관에서 일한다는 소식과 함께, 그녀가 머무는 장소의 이름까지 전했을 때였다. 그때 지윤의 눈에 스치던 묘한 기류. 이 흐름은 그 순간 이미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윤아, 이것 좀 봐."


미애의 부름에 지윤이 다가왔다. 속을 들여다보자 빛이 부딪치며 금세 별을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제각각 뿌려져 있던 부스러기들이었다. 방향을 비트는 순간 배열이 달라졌다. 지윤은 망막에 비친 그림에 얼굴을 떼지 않은 채 계속 돌렸다.


"가끔은 세상도 이랬으면 좋겠어. 살짝만 돌려도 전혀 다른 모양이 되는 것처럼."


미애의 목소리가 두텁게 가라앉았다. 그 시절 우리는 서로의 아픔을 다 안다고 믿었다. 말로 꺼내지 못한 그늘과 숨기려 했던 흔적들까지. 만화경 속에서는 그것들조차 대칭 속에 안착해 가만히 빛나고 있었다. 그때 우리가 나누었던 비밀들은 이제 어디로 흘러갔을까.


지윤은 다시 현재의 거실로 돌아와, 만화경에 열중한 아들의 동그란 정수리를 바라본다. 식탁 위에 놓인 미애의 초대장 위로 오후의 햇살이 길게 누웠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