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노란 꽃 아래

by dropfairy

손을 펴고 구슬을 놓았다. 던지지 않았다. 굴리지도 않았다. 손바닥에서 떨어진 높이만큼 흙 위에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마른 잎들이 살짝 눌리며 자리를 내준다. 더 움직이지 않는다.

순서가 다시 바뀐다.
원통 안에서 부딪히던 것.
손끝에 남아 있던 것.
그림마다 찍혀 있던 것.
지금, 꽃 아래 남은 것.




지하철 문이 열리고, 사람들 사이로 셋이 나온다.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숨이 조금 빠르다. 마지막 계단. 지윤의 발이 멈춘다. 노란 꽃다발을 든 손, 익숙한 등이 스친다. 그 사람은 곧장 걸어간다. 유리 건물 쪽으로. 지윤의 시선이 거기에 박힌다.


길이 두 갈래로 갈린다. 유리 건물과 철문. 오른쪽, 동물원 철문 너머로 아이들 목소리가 튄다. 진우가 먼저 뛴다. 작은 신발이 바닥을 두드리며 앞서간다. 남편이 따라붙는다. 지윤도 속도를 맞춘다. 보지 않기로 한 얼굴로 걷는다.


동물원 투명벽 앞에 아이가 선다. 손바닥이 닿고, 입김이 번진다.


“왜 안 나와?”

지윤의 손이 아이 머릿결을 따라 그대로 아래로 흐른다.


움직이지 않는 몸. 깨어 있는 눈. 서로 닿지 않는 거리. 분명 거기 있다.



벤치.

지윤이 앉는다.

가방은 지퍼가 반쯤 열려 있다.

접힌 종이 한 장, 모서리가 반듯하다.

손이 닿지 않는다.


유리 원통 안.
빛이 흩어진다.
맞물리지 않는 틈 하나가 남는다.
그 틈으로 해가 길게 들어온다.
무늬가 잠깐 새삼 밝아진다.

동물원 길.
세 사람이 나란히 걷는다.
박자가 어울린다.
누군가를 향해 가지 않는 길.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전시장 안.
관람객이 빠져나간 자리.
빈 공간이 도형처럼 선명해진다.
미애는 손을 뻗지 않는다.
이내 눈을 거둔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자리.
무엇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잡지 않아도 남는 것만이 내 것이 된다.
손 안의 온기가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나를 방치하기로 마음먹는다.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 위에, 미술관과 동물원이 경계를 공유한다. 두 공간은 서로를 설명하지 않지만, 어딘가 닮아 있다.


지윤은 그날, 정확한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

“어디 가?”
남편이 묻자, 지윤은 잠깐 생각하다 대답한다.
“바람 좀 쐬고 싶어.”
진우는 이미 신발을 신고 있었다. 어디든 상관없는 몸짓이다.

지하철에서 올라온 남편이 다시 묻는다.
“어디로 갈까?”

지윤은 숨을 놓은 채 한번 더 현수의 뒷모습을 본다.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이쪽.”

지윤이 고개를 돌린다. 동물원 쪽으로 진우가 미리 걷는다. 통통한 발자국이 가볍게 앞서간다.


그날 지윤은 전시장에 가지 않았다. 가지 못한 게 아니라 가지 않은 것도 아니다. 다른 쪽을 선택한 것뿐이다.




미술관 안은 온도가 낮았다. 말소리는 위로 뜨지 못하고 바닥 가까이에서 흩어졌다. 정인은 입구를 지나며 제목을 읽었다.

〈가면의 만화경〉

읽는 순간, 덮어 둔 장면 하나가 얇게 펼쳐진다. 창가 자리. 종이 원통. 연필 끝. 정인은 더 보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1998년, 봄. 교실.
만화경이 바닥에 떨어진다.
안에서 부딪히며 금 간 소리를 낸다.
미애가 몸을 숙여 원통을 집는다.
입구를 눈에 가져다 대고 한 번, 더 돌린다.
중심에 작은 붉은 점 하나.
미애의 눈이 오래 머문다.

첫 번째 전시실.

유리 케이스 안에 종이로 감싼 원통이 놓여 있다.

가장자리가 닳아 있다.

그 옆, 목걸이 하나.

중앙에 박힌, 둔한 붉은 결정.

정인은 숨을 얕게 내쉰다.

표면에 김이 떠돌다 사라진다.

다음 방.

벽면 가득 드로잉이 걸려 있다.
연필선 위에 얇게 얹힌 색.
그림마다 여자의 목에 장식이 걸려있다.
모든 그림 위에 같은 위치.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는 정인의 걸음이 느려진다.

마지막 방.

돔 형태의 케이스 하나, 덮개가 열려 있다.
안쪽에 노란 꽃들이 여백을 메운다.

붉은 조각 하나가 뒤늦게 발견된다.

정인이 어깨를 낮춘다.
무게가 어느 쪽이든 모이지 않는다.

색을 더해도 점선만 이어진다.

다시 첫 번째 방.

순서가 머릿속에서 재배열된다.

원통에서 빠진 것.

목에 매단 것.

피어난 꽃들 사이에 놓인 것.

사슬 끝 붉은 점이 사라졌다.

빈 고리만 남아 있다.


유리 건물 바깥.
정원 한쪽.
흙을 밀고 올라온 노란 꽃 몇 송이.

복수초가 제 이름을 찾아 피어 있다.
햇빛을 정면으로 받는다.
작고 또렷하다.
남아 있는 것들이 제각각 빛난다.




장례식 날. 검은 옷들 사이로 기운 빛이 드리워졌다. 향 냄새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아버지의 생경한 유품이 미애의 손 안에서 맴돈다. 날이 깊어지자 원통을 연다. 파편들이 쏟아지며 투두둑 소리가 난다. 손끝으로 하나씩 밀어낸다. 마지막에 남은 붉은 원형만 따로 빼낸다.


교실에서 연필을 세운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에 쌓인다. 지윤이 옆에서 묻는다.
“왜 맨날 거기야.”
미애는 고개를 들지 않는다. 연필 끝이 종이를 더 깊숙이 파고든다. 마지막에 붉은색이 올라간다. 같은 자리. 작고, 흔들림 없이 눌린다.




전시장 너머, 겨울이 막 물러난 자리. 덜 풀린 흙이 군데군데 갈라져 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구석에서 연두 잎이 점점이 올라온다. 꽃샘바람에 흔들린다. 옆으로 쏠렸다가 제자리를 찾아 선다.


만화경은 부서진 조각으로 흔적을 만든다. 그리고 어떤 잔해는 밖으로 나와 다른 곳에 놓인다. 몸 위에, 기억 위에 그리고 지금, 노란 꽃 아래에.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