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보면 나무가 품어 기르는 따뜻한 집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집이 아니라 입술이었다. 숙주의 혈관에 뿌리를 꽂고 수액을 빨아먹는 초록 입술. 둥지가 아니라 기생이었다.
정인은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 위에 휴지를 눌러 댔다. 흰 종이가 천천히 붉게 물들었다. 그 사이로 거실 끝에서 들리던 아버지의 기침과 헛구역질이 한 발짝씩 멀어졌다. 정인에게 이 선홍빛 액체는 마지막으로 그어 놓은 경계선이었다. 배어든 얼룩 위로, 며칠 전 지윤의 집 부엌에서 끓던 짙은 약물이 스며들 듯 따라붙었다.
“그게 뭐야?”
정인이 묻자 지윤은 냄비 안을 숟가락으로 뒤적였다. 마른 가지들이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겨우살이. 우리 아빠 암에 좋다고 해서 달이는 거야.”
지윤의 아버지는 소파에 길게 누워 있었다. 지나치게 마른 몸이 이불 위에서 윤곽만 슬쩍 남아 있었다. 지윤은 싱크대 옆에 놓여 있던 바구니를 끌어왔다. 그 안에는 잎이 붙은 가지 몇 개가 담겨 있었다.
정인은 손에 쥔 휴지를 내려다본다. 붉은색이 종이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자기 몸에서 흘러나온 것에 겨우 매달려 있다.
“이게 겨우살이야.”
지윤이 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잎은 두툼했고 마디마다 둥글게 갈라져 있었다.
“얘들은 땅에 뿌리를 못 내려.”
지윤은 가지 끝을 손가락으로 굴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큰 나무에 매달려 살아. 나무가 끌어올린 수액을 뺏어 먹는 거지.”
냄비 안에서 약물이 낮게 끓었다. 검은 김이 천천히 올라왔다.
“웃기지 않아? 남에게 빌붙어 사는 게 몸에 좋은 약이 된다니.”
지윤은 숟가락으로 차를 한 모금 떠 입에 댔다가 잠깐 얼굴을 구겼다.
이내 미간을 펴고 정인을 곁눈질로 바라보던 지윤이 말한다.
“근데 겨우살이도 꽃을 피운대. 작고 노란 꽃.”
정인이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위로 흩어지며 천장에 옅게 번졌다. 말이 비어 있는 틈을 지윤이 다시 건드린다.
“나무가 죽어야만 끝나는 기생 말고, 그냥 꽃으로 피는 날이 있겠지?”
정인은 바닥을 닦던 손을 멈춘다. 지윤의 말이 머릿속에서 만화경처럼 돌아간다.
쾅. 현관문이 벽에 부딪혔다.
장마철의 녹녹한 공기를 밀어내듯, 알코올 냄새가 먼저 들어왔다. 정인의 아버지가 젖은 우산을 바닥에 던지듯 펼쳤다. 끝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군데군데 번졌다.
“나와. 당장.”
비틀린 걸음이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손등이 식탁 모서리를 쓸고 지나갔다. 그릇이 후드득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깨진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정인은 침대 밑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숨을 눌렀다. 방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곧바로 이어졌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손이 바닥을 더듬었다. 곧 발목이 잡혔다. 몸이 끌려 나왔다. 등 뒤로 깨진 파편이 밀리며 스쳤다. 따끔한 감각이 늦게 따라왔다.
아버지가 정인을 세워 벽에 밀어붙였다. 숨이 거칠게 튀었다.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주먹이 올라갔다. 정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윽”
타격 대신, 끊어지는 소리가 먼저 났다. 정인이 눈을 떴다. 아버지가 한 걸음 물러서 있었다. 시선이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발목 아래, 깨진 접시 조각이 깊게 박혀 있었다. 그 틈에서 피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붉은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하나, 또 하나.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질렸다. 입을 틀어막은 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돌아서서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난히 작게 울렸다.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묶인 것처럼 서 있었다. 발목에서 떨어지는 것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바닥에 닿기 전까지의 짧은 거리. 그제야 알았다. 그의 급소가 어디에 있는지.
팔목에 하나둘 새겨진 선들은 내가 이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지불하는 입장료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가 술병을 따면 나는 칼을 들었다. 그것은 자해라기보다는 일종의 '미끼'였다. 내 피 한 방울을 던져주고, 맹수의 아가리를 닫게 하는.
휴대전화가 울린다. 집이다. 정인이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금속이 바닥에 부딪혔다. 짤그랑, 짧게 긁히는 소리. 정인은 눈을 감았다. 저 소리는 시작이 아니라, 이미 한 번 놓쳤다는 신호이다. 아버지는 피를 못 본다. 그래서 더 엉뚱한 데로 간다. 보지 않아도 되는 쪽으로만 밀어붙인다. 부딪히고, 깨뜨리고 끝내 멈춰야 할 순간을 지나서야 멈춘다.
조금 전, 엄마의 숨이 전화기 너머로 잘게 부서졌다.
“문 잠갔어.”
그 뒤로는 말이 아니라 소리였다. 문고리를 거칠게 흔드는 소리, 둔탁하게 부딪히는 충격, 그리고 한 번 금속이 떨어지는 소리. 손에서 미끄러졌거나 잠깐 놓친 것이다. 정인은 그 장면을 안다.
바다를 바라보며 뒷모습을 찍고 있던 친구들에게 다가갔다.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지윤이 눈을 크게 떴다.
“지금?”
정인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응. 집에 일이 생겨서.”
내가 손목을 긋는 건, 죽고 싶어서가 아니다. 피는 소리가 없다. 피가 흐르는 순간, 몸 안에서 웅웅 거리던 것들이 잠깐 끊긴다. 방 안의 소란도, 내 안의 소리도 함께 가라앉는다. 아버지는 뒤로 물러나고, 나는 그 틈에 숨을 쉰다. 이건 끝내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버티기 위한 방법이다. 가장 조용하게 가장 큰 소란을 멈추는 방식이다.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간다. 기생이라 부르기엔 어딘가 어긋난 자리. 나는 아버지라는 나무에 매달린 겨우살이가 아니다. 오히려 내 피를 건네며 괴물을 재우는 공생 쪽에 가깝다. 셔츠 소매를 걷는다. 아물지 않은 붉은 선들이 나를 기다리는 집처럼 선명하게 피어 있다.
서울, 전시장〈가면의 만화경>.
관람객들이 원통 안을 들여다본다. 깨진 거울 조각들이 서로의 단면을 비추며 무늬를 만든다. 빛은 흩어지고, 조각들은 잠깐 맞닿았다가 곧 어긋난다. 무너짐과 형성이 같은 속도로 스친다. 완성은 끝내 도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에 기대어 다음 무늬가 무엇이 될지 모른 채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기다림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나는 멈춰 서기를 택한다. 오지 않는다면 기다리지 않겠다. 더는 매달리지 않고
내가 먼저 스스럼없는 노란 꽃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