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당한 구보씨의 일일

꿈을 꾸는 여자

by dropfairy

구겨진 신발 바닥의 빗살무늬 홈에서 누런 빗물이 툭툭 떨어지고 있다. 구보씨는 웅덩이진 곳을 첨벙첨벙 아무렇지 않게 밟아대고 있고 그때마다 오물과 흙으로 뒤섞인 빗물에 구보씨의 신발이 삼분의 일쯤 잠겼다 되살아났다.


M동 주택가는 누군가가 남산보다도 지대가 높다고 한만큼 물 고인 자국이 많은 편은 못됐다. 나흘동안 계속된 장마에도 흙빛이 도는 거리 색이 조금 다르다고 느껴질 뿐 물난리로 아우성치는 사람 같은 건 찾을 수 없었다. 구보씨는 나흘동안 창 앞에서 물 흘러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빗물은 노상 주차된 얼룩얼룩한 차들과 퍼렇게 잎을 매단 나무의 몸통을 지나 바닥으로 어지럽게 치달아갔다. 그 속을 한 여름에도 휴가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우산을 낮추고 종종거리고 있다.


오르막이 계속되는 주택가에서 점점이 사람들이 내려온다. 구보씨도 한낱 점이 되어 그 길을 떠내려왔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오늘에서야 그쳤다. 화요일 오전 11시 34분. 비는 그쳤지만 하늘도 사람들 얼굴도 채 개지 않았다. 거리는 여태 무거운 구름에 눌려있다.




나는 전철역이 붙어있는 지하도를 건너려다 오른쪽으로 200미터쯤 더 걸어가야 하는 횡단보도 쪽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도로를 건너고 왼편으로 300미터쯤 다시 걸어가면 안전슈퍼마켓이라고 쓰인 모퉁이가 나온다. 연이어 s세탁소와 k마트를 지나면 놀이터가 보인다.


놀이터에는 공놀이하는 남자애들이 파 놓은 듯한 오목한 구덩이가 곳곳에 널려있다. 구보씨는 구덩이에 담긴 황토물을 피할 생각도 없이 반듯하게 앞으로 걸어간다.

웅덩이를 막 벗어난 구보씨의 신발은 더러운 것을 닦고 채 짜지 않은 걸레처럼 축축하게 늘어졌다. 구보씨는 흙탕물 속을 세 번쯤 들어간 신발을 끌고 나흘동안 내리친 비로 페인트 자국이 묻어날 만큼 눅눅해진 녹색 벤치에 앉았다.

놀이터에는 거름 색 신발의 어린애 두 명이 벤치 옆, 잎 없는 나무에서 꺾은 힘없는 나뭇가지로 땅을 파고 있다. 처음에는 뭔가를 그리는 것 같더니 이내 삽질을 하듯 마구 파헤친다. 나흘동안 물만 먹은 흙은 실신한 듯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나는 S아파트 103동을 보고 있다. 103동에서는 놀이터의 두 아이들이 보일 것이다. 구보씨 눈에 103동이 훤히 들어오듯이. 구보씨는 12층 아파트의 오른쪽을 바라본다. 그곳에는 자취도 본 적 없는 K, B, I, M, J 등이 살고 있을 것이다. 또 YH씨도 살고 있다.

그는 비가 오면 손잡이 끈이 엷게 갈라진 체크무늬 우산을 펼친다. 걸을 때는 비가 고인 파인 도로가 없는지 줄곧 바닥을 살핀다. 거리에서 해초냄새가 난다고 코를 찡긋하며 흥흥거린다. 옷과 신발을 적신 성가신 빗물을 연신 티슈로 닦아낸다.


그는 비 오는 날 미끄러진 적이 종종 있다. 두 해 전에도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전철 계단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때 심하게 발목이 부은 그를 내가 부축했었다. 이후 그가 비에 젖은 계단을 내려갈 때면 한 손으로는 난간을, 다른 한 손으로는 나를 붙잡곤 했다.




녹색 벤치에 닿은 남색 바지에서 물비린내가 느껴진다. 땅속을 뒤집어놓던 어린애 둘은 103동에 사는 엄마의 부름을 들었는지 이내 들어가고 없다. 구보씨는 냉랭하게 젖은 속옷을 의식하면서도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는다.

YH 씨와 이 벤치에 마지막으로 앉아있던 날, 하늘은 이미 텁텁하게 낮아져 있었다. 구보씨와 YH 씨는 해 뜨는 곳의 뜨거운 모래 위에서 보낼 주말부터의 일정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기로 했었다.

휴가 일정을 맞추기 위해 며칠 동안 평소보다 늦게까지 일을 한 그의 눈 밑은 검푸른 바다 색 아이섀도를 바른 듯 어두웠다. 그는 연신 하품을 하며 붉은 일출과 금빛 모래로 채워진 계획에 새실거렸다.


구보씨는 복잡한 사람들 틈에 끼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잠잠한 배경과 쾌적한 온도가 있다면 어딘가 떠나지 않아도 충분하다. 더위를 피하러 가는 피서인데 끈적이는 바닷물에 몸을 담그고 따가운 모래 위를 걷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흐느적거리는 공기와 어젯밤 일기예보를 접한 구보씨는 내일부터 장마가 시작될 것 같다고 말했다. 비 내리는 바닷가 여행은 취소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YH 씨라면 흔쾌히 동의할걸라고 생각하니 거침없었다.


YH 씨는 대학생 때 비가 많이 오면 학교에 가지 않았다. 레인부츠를 신어도 양말 틈으로 비가 스며들고 가방과 머리카락에 쿰쿰한 냄새가 달라붙는 게 싫었다. 와중에 D대 후문 계단을 열개 넘게 굴러간 뒤부터는, "비 오는 날 YH 씨는 학교에 오지 않는다"는 루틴을 교수님도 알게 되었다.

비에 젖은 계단을 뛰어가다 발이 꺾이며 살짝 비틀대는 줄 알았는데 몸이 대굴대굴 굴러갔다. 아래로 10미터쯤 지나 멈추었을 때, 학우들이 병원에 데려가주겠다고 다가왔지만 얼굴을 가린 채 계속 괜찮다고만 주억거렸다. 너무 창피해서 당장 일어나 도망가고 싶은데 몸이 도통 움직이지 않아 최소 10분은 계단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있었다.




구보씨는 YH 씨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휑하게 돌아서 가버린 까닭을 잘 알지 못한다. 두 시간 남짓 구보씨의 질긴 전화를 모두 피하다가 "영원히 안녕"이라는 문자만 덜컹 내놓은 까닭은 더욱 알지 못한다.


그날 밤 나는 어두운 방안에 포획된 짐승처럼 웅크려 건조한 라디오 소리를 들었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나운서가 시시콜콜한 사연들을 읽어 내리는 동안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 나흘이 되도록 한 번도 그치지 않고 힘차게 쏟아졌다. 뉴스에서는 장마가 시작됐다고 했다. 이번 장마는 일주일 정도 갈 것 같다고 했다. 그러다 5일째 되는 화요일 언제부턴가 비가 그쳤다.


구보씨는 나흘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빗소리에 어느덧 잠들었다 깨어난 시각에도 시간은 채 한 시간도 흘러있지 않았다. 그래서 구보씨는 나흘동안 비가 한 번도 그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나흘동안 줄기차게 비 소리를 들은 구보씨는 물소리에 중독되어 5일째 되던 날, 그만 수면에 빠져버렸다.

구보씨가 일어난 것은 화요일 오전 10시 57분.

라디오에서는 물난리 난 동네 이야기들이 북적거리고 있다. 별 다를 것 없는 장마철 소리가 흐르고 있었다. 화요일 오전 11시 34분. 구보씨는 나흘 만에 내리막길을 걸어갔다.




나는 모래 알갱이가 수 백 개는 붙어있는 신발을 신고 S아파트 103동 맨 오른쪽 베란다를 쳐다보며 남색 바지에도 흰 양말에도 누런 비 자국이 선명하도록, 후줄근한 녹색 벤치 위에 앉아있다.

거뭇해져 가는 회백색 하늘 밑에서 벤치 밖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땅 파던 아이들은 두 시간 전쯤에 사라졌고 퇴근하던 사람들도 이제 어디론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

구보씨 머리 위로 여린 구름이 흙빛으로 부풀어 올랐다. 놀이터의 웅덩이에서 톡톡 물방울이 튀어 오른다. 구보씨 신발에 선한 물 기운이 서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