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tto'에게
지금까지 내 삶의 9할은 애인이 없다.
눈이 높았던 적도 있고 낮췄던 적도 있고 요즘엔 감정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 버티는 중이다.
성격, 능력, 외모 중에서 2개 정도만 괜찮으면 만나보라는 얘기를 들었다. 객관적으로 셋다 나쁘지 않으면 연애를 시작하는 게 타당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마흔 중반이 넘었으니 주변에서 괜찮다며 소개해주는 분들은 보통 50세 전후의 연령이다. 실제로 보면 "그 나이에 이 정도면 괜찮다."라는 말에 공감이 간다.
지난 1년 안에 머리가 인정할 만한 사람을 5명은 본 것 같다. 그런데 결국 연애를 또 못했다. '닳고 닳은' 또는 '설레지 않는'이라는 느낌이 주저하게 만들었다.
내게 애인이 없지만 20년이 넘은 남사친은 있다. 문학과 예술에 관한 주제로 대화를 하던 채팅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거의 매일 개설한 내 방에 단골이었던 그 아이와 한 달 넘게 아방가르드한 날카로운 주제로 얘기를 나눴다. 이후 지금은 없어진 혜화역 '민들레영토'에서 그 아이를 처음 봤다.
동갑내기 아이의 첫인상은 공격적이고 다소 어두웠다. 어색하고 불편해서 겉도는 말만 하다 집에 가려는데, 돌연 그 아이가 돌돌 만 신문지를 내게 건넸다. 의아해서 펼쳐보니 초록빛이 스민 새하얀 꽃이 담겨있었다. 그때 이 아이와 친구가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우리는 평행선이 되자.
"한 점에서 만났다 점점 멀어지는 교차선이 아니라, 만나지 않아 평생 같이 갈 수 있는 평행선이 되자."
그 아이가 먼저 내게 말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서로의 '평행선'이 되었다. 남녀 간의 우정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아이와 나는 믿고 선택하고 지켜냈다. 사실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지금까지 서로 손을 잡아 본 적도 없다. 스킨십을 완벽하게 배제하고 함께 한 모든 순간에 순도 높은 내적 교류를 했다.
스스로를 '여린'의 '린'이라고 부르며 본인은 달을 닮았다고 말했다. 나는 '캐릭터성이 강한 사람'이라고 칭하며 해를 닮았다고 알려 주었다. 서로 발현되는 이미지는 달랐지만 내면이 많이 닮아있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슬픔, 아픔, 고통을 내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공감이 아니 동감. 그 친구 표현에 의하면 우리는 'ditto'다.
나는 '린'이고 너는'연'이니 우리는 '인연'이야.
작년에 'ditto'를 만났다. 개인 도서관 겸 아지트 공간을 만들었으니 구경 오라고 했다. 결혼을 절대 하지 않겠다던 아이는 유부남이 되었다. 내심 신경 쓰여 와이프랑 같이 보자고 했더니 와이프가 둘이 만나라고 했단다. 전 여자 친구랑 만날 때는 셋이 봤는데 난 여사친이니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봤던 게 그 아이가 결혼하기 전이니 대략 10년쯤 전이었나 보다. 나랑 같은 40대 중반이 된 아이가 웨이브 파마를 하고 어깨까지 머리카락을 치렁거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 머리가 왜 그래? 너도 자연인이냐?"
"넌 주름 많아진 것 말고 똑같네."
'린'은 10년 전에도 나에게 같은 말을 했다.
"주름 많아진 것 말고 똑같네."
10년 전에는 기분이 나빴는데 작년에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제 주름을 당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서로 간단하게 외모평을 하고 '린'에게 수수한 흰꽃 배경에 하늘색 음영을 넣은 꽃다발을 건넸다.
"너한테 내가 꽃을 준 적이 없더라. 근데 이 꽃다발은 네 와이프 거야. 네 반쪽이니까 너랑 비슷할 것 같아서 너랑 어울리는 꽃으로 골랐어. "
그날 특별한 대화를 한 것 같지는 않다. 일상과 근황을 얘기하다 이십 대 초반의 미숙함과 여림과 상처를 공유했던 동지애를 잠시 깨닫기도 했다.
제일 먼저 유부녀가 되었던 나는 가장 빨리 혼자가 되었고 평생 나랑 평행선으로 같이 놀아주겠다던 '린'은 현재도 유부남이다.
각자의 선을 그어가며 가끔 마주 보고 위로와 위안을 얻는다.
서로의 선을 그어가며 위로의 대화를 나누고 어둡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홀로 선 길에서 내 선이 길어질수록 나란히 뻗어가는 평행선이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었다.
각자의 삶에 치중하느라 몇 년 동안 왕래를 하지 않은 적도 있고 그 아이가 결혼을 한 이후로는 더 연락을 하지 않았다. 카톡 프사 정도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네가 존재함에 안심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항상 조금씩 위태로워 보였던 '린'은 내 나이가 되어 한결 단단해지고 편안해진 듯했다. 나는 '린'과 같은 나이가 되어 주름이 많이 늘었지만, '순수하고 설레는' 사랑을 꿈꾸는 여전한 '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