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상하다
같이 식사할래요?
불편하시면 거절하셔도 됩니다.
명확한 답변 좋아요.
지인이 되어도 되고 타인이 되어도 괜찮아요.
당신을 좋아하지만 나 자신을 더 사랑해요.
만나서 우리 관계를 명확히 정리하고 싶어요.
곧 연락하겠다고, 시간을 맞춰보자고 했다.
계절이 바뀌도록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명확한 답변을 들었다.
그가 그런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닳고 닳은, 크게 욕먹지 않을 만큼 비윤리적인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메시지는 꾹꾹 눌러쓴 무게가 느껴진다. 나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당신의 본심을 꺼내 보라"라고 다그치는 것 같다.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장점만 공유하며 가볍게 산책하듯 만나고 싶었다. 그녀는 내 손을 잡고 더 멀리 조금 더 숨차게 걸어가려 한다.
"명확한 답변 좋아요." 이 말에서 그녀의 초조함을 읽었다. 쿨한 척 말하지만 내 답장을 기다리며 몇 번이나 휴대폰 화면을 켰다 껐다 했을 것이다. 그 온도가 나에게는 뜨겁다.
"지인이 되어도 되고 타인이 되어도 괜찮다"라고 그녀는 말했지만 정말 아무렇지 않은 사람은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제발 타인이 되지 말아 달라는 약자의 고백을 듣고 말았다.
그녀의 불안을 달래주기 위해 내 시간을 쪼개고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 그녀의 진지함이 나를 답답하게 조여오기 전에 함구가 만들어 준 느슨함 속으로 파고든다.
침묵은 안전하다.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희석되고 그녀도 결국 나를 '바빴던 사람' 혹은 '인연이 아니었던 사람'으로 분류하며 서서히 잊어줄 것이다.
"우린 안 맞아"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나쁜 놈'이 되지만, 연락을 끊는 것은 그저 '소홀한 놈'이 될 뿐이다.
그는
여린 꽃잎을 따고 문턱에서 웃었다.
그는
뿌리째 흔들리는 무게를 견딜 재간이 없다.
그는
침묵의 옷을 입고 친절한 인상의 가면 뒤로 숨었다.
그는
발자국을 지우며 길을 만들고 자유롭게 걸어간다.
그의 처음과 끝을 예견했다. 존재의 가벼움, 순간의 열정, 미약한 진심, 노련한 회피까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의 유혹에 넘어갔다.
내가 유혹했는지도 모른다. 틈을 내고 시간을 주고 눈을 마주치고 설렌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훌륭하다고 거듭 말하며 내 손을 잡은 그에게 동조했다.
그와의 교제를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작과 끝의 간극이 한 선에 붙어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이다. 아프리라 짐작하며 선택했고 미련 없이 찰나만큼 기뻤다. 처음으로 울지 않고, 밤을 지새우지 않는 실연을 맞이했다.
그는 이상하다. 짧지 않게 알고 지냈는데 사랑한다고 말한 후 당연스럽게 연락두절되었다. 내가 더 이상하다. 그의 사랑이 세치 혀의 움직임이라는 걸 알면서 백지의 아이처럼 그에게 빠졌다.
1년 전 어림셈이 1년 후 정확한 결괏값을 보여줬다. 오늘을 알면서 그를 택한 내가 정말 이상하다. 궁금한 건 오답 정리를 해가며 문제풀이를 해봐야 속이 시원한 내가 제일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