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은 대로
거대한 거북이 떼들이 출몰했다. 끄응끄응 엉금 대며 자동차들이 기어간다. 텁텁한 공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간헐적인 빠앙 소리가 들린다.
도로 위의 정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운전대를 잡고 전방을 초점 없이 응시했다. 회색 중형차 엉덩이 위로 네임펜을 덧칠해서 쓴 듯한 글자가 붙어있다.
[ 담배가 타고 있어요 ]
저게 뭐야? 잘못 봤나? 설마?
단순한 알림이 아니라 '경고' 혹은 '광기'처럼 느껴졌다. 차 안에서 담배를 얼마나 태우길래 아예 타오르고 있다고 공표를 하는 걸까? 담배가 아무리 좋아도 저렇게 광고를 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녀는 창문을 꽉 닫고 내부순환 버튼을 눌렀다. 끈적이는 타르가 스멀스멀 넘어오는 것 같다. 몇 차례 신호가 바뀌고 차 사이가 좁혀졌다. 구름에 가려졌던 햇빛이 쨍하게 나오며 예의주시하던 차를 수직으로 내리쬔다. 조잡한 글씨의 디테일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태양이 각도를 틀어 승용차의 뒷유리를 정면으로 비춘 순간 새로운 글씨가 보였다.
[ 남매가 타고 있어요 ]
차량 뒷유리의 문구는 지독한 흡연가의 선언문이 아니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안전 당부였다. '남'의 'ㄴ'은 먼지가 띠처럼 붙어 'ㄷ'처럼 보였고, '매'의 'ㅁ'은 끝이 삐져나와 흡사 'ㅂ' 같았다. 머릿속에서 퀴퀴한 냄새를 뿜어내던 '담배 빌런'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독한 체인 스모커인 줄 알았던 차주는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있는 남매를 키우는 평범한 가장이었다.
상시 정체구간을 지나고 브레이크 등이 꺼지며 남매가 멀어져 갔다. 헛웃음과 함께 창문을 내렸다. 담배 연기 대신 익어가는 가로수의 갈색 향이 들어왔다. 다행이다. 타오르고 있는 건 그녀의 착각뿐이어서.
공황장애와 불면증으로 두 시간 이상 연속해서 잠들지 못한다는 그녀. 언니는 십수 년째 정기적으로 약을 처방받고 있다.
퇴근 후 잡아탄 택시 기사가 유독 말이 많다. 평소보다 수면장애가 심해져 예약일을 4일 앞당겨 의사를 만나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대꾸만 하며 참고 있는데 멈출 기미가 없다. 눈을 감고 있어도 뻔히 알 만한 길을 빙빙 돌아가며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인다.
회사에서부터 묻어온 불쾌한 감정들이 가미되어 마그마가 끓고 있다. 부글부글 치밀어 오른다. 위로 솟구치다 쏟아질 것 같다. 폭발을 막아야 한다. 영차영차 심호흡을 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린다. 멀리서부터 커다란 글자 네 개가 언니의 눈에 박혔다.
[ 욕 설 자 제 ]
하루 종일 언니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퍼부었던 거친 말들, 세상을 향해 날 세웠던 미운 마음들이 이 네 글자 앞에 무너져 내렸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았지?" 신이 언니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고는 길 한복판에 경고장을 붙여놓은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이 탁해서 몸이 아픈 건가?" 찰나의 성찰이 휘몰아쳤다. "앞으로는 예쁜 말만 하고, 욕설은 입 밖에도 내지 말아야지." 언니는 숙연해진 입을 모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간판 이름이 '욕설자제'라고? 말이 돼?" 길을 돌고 돌아 간판에 가까워진 택시가 신호에 멈춰 서자 똑똑하게 눈을 뜨고 다시 쳐다봤다.
[ 욕 실 자 재 ]
'설'인 줄 알았던 글자는 조명이 빚어낸 착시였고, '제'는 빛바랜 '재'였다. 언니는 화장실 인테리어 상점을 지나가는 아픈 직장인이었고 길목엔 흔한 욕실자재 가게가 있었다.
삶의 수많은 갈등과 에피소드가 이런 착각과 오해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보는 법이다. 그 덕에 잠시나마 언니의 독기가 가라앉았으니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