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의 사랑
주황색 교복을 입고 횡단보도를 건너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였나. 앞서 걷고 있던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가 언뜻 뒤를 돌아봤고 난 그 아이의 눈이 깊다는 생각을 했나 보다.
이후로 등하굣길에 그리고 심화반과 논술부 시간에, 나의 초등학교 짝꿍이면서 고등학생이 되어 다시 편집부 동기가 된 친구 옆에서 나는 그 아이를 문득문득 보게 되었다.
그 애와 단 둘이 있었던 유일한 시간, 대학 입학원서를 넣기 위해 염주체육관으로 가던 길에 교문 앞 횡단보도 앞에 먼저 서 있던 그 아이가 뒤를 돌아봤고 우리는 같은 목적으로 같은 곳을 가려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 한 군데 입시원서만 넣었던 그 아이는 내 줄까지 대신 서주면서 무사히 접수를 마쳤고 나는 갓 상경한 부모님을 뵈러, 이제 서울로 올라가야 했다. 그 아이는 나를 배웅해 주겠다며 광주역까지 동행해 줬고 역가 서점에 들러 내게 한 권의 책을 선물했다. '막스 뮐러'의 <독일인의 사랑>
그 아이가 가장 좋아한다는 그 책. 그 사실을 친구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고 이미 나는 숱하게 읽고 있었다. 그 아이는 책 앞표지에 '친애하는 연희에게'라고 적어 그 책을 내게 건넸다.
그렇게 광주에서의 연이 끊기고 우리는 둘 다 서울로 진학을 했다. 대학생이 되고 3개월쯤 지나 동창회에서 다시 그 애를 보고 나는 좀 설레었나 보다.
일부러 약한 척도 해 보고 기대도 봤지만 그 아이는 너무도 조심스러웠고 나는 내심 실망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에게 전화를 한 사람은 심화반에서 얼굴만 익숙했던, 말 한마디 해 본 적 없던 다른 친구였다.
개그맨이랑 이름이 똑같아서 아이들이 자주 웃었던 하지만 항상 앞에서 상을 받던 어찌 보면 여자애들이 많이 좋아할 수도 있는 아이. 엉겁결에 연락을 받고 좀 서운했나 보다.
내 연락처를 알고 있던 남자아이는 오직 그 애뿐이었는데 그 아이가 내 연락처를 다른 남자애에게 알려줬는데 그 친구는 3년이 넘어 처음으로 말을 걸어 내게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기다리던 그 아이에게서는 아무런 진전을 느끼지 못했다.
여기서 그 아이와 나의 연은 끝이 났다.
나는 재수를 하겠다고 한 학기도 되지 않아 학교를 뛰쳐나왔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다른 친구들과의 연락이 점차 끊겼고 그 후로 어떻게든 평범하고 싶지 않았고 위태로울 만큼 나를 혹사시켜 가며 일을 하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22살, 혹자들은 영화 같다고 말하는 사랑을 했기에 더 이상 그 아이를 떠올리지 못했다.
그 아이와 나는 내면이 참 많이 닮았던 것 같다. 좋아하는 작가, 책, 음악, 언어, 분위기, 눈빛, 미소마저도 비슷했다.
그 아이는 키가 작고 친구들은 원숭이 같다고 평했고 얼굴이 주로 붉었고 하지만 맑고 순박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일 년에 한 번씩 오시는 교생 선생님들은 내게 항상 이리 말했다. 남자반에 너와 참 많이 닮은 아이가 있다고. 난 그 아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나와 닮은 언어로 나와 닮은 꿈을 말하고 나와 닮은 실천을 하고 비슷한 취향 때문에 어딜 가나 자주 마주치곤 했다. 하지만 정작 둘이서 얼굴 한 번 제대로 쳐다보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닮아서였나.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주욱 나와 닮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그렸다. 백마 탄 왕자님을 꿈꿔본 적이 없다. 내가 충분히 갖추지 못했는데, 충분히 아름답지 못한데 나보다 더 나은 누군가를 기대하는 건 탐욕스러운 것 같아서 그리고 결국 허망하게 깨어질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바라고 싶은 모든 것을 내 안에서 충족시키려고 했다. 때문에 좌절이 적었다. 타인에게 기대하는 건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 자신에게 바라는 것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나는 대단한 연을 꿈꾸지 않는다. 다만 나와 닮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같은 것을 보고 비슷하게 느끼고 같이 즐거워하고 같은 길 위의 이상을 추구하고 사람들이 흔히 이해할 수 없는 세세한 감정도 우리 둘만은 공유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서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웃으며 이해하고 우리는 '공유'와 '이해'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바람이 그리 어려운 것이었는지 나는 이제껏 그 아이 이후에 나와 참 닮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나와 온통 다른 것 투성이인데 내 열정과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 누군가를 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운명이 나를 거부했고 나는 이제 많이 신중해졌다.
나와 닮은 사람이면 좋겠다. 서로 닮은 우리가 함께 한다면 우리의 꿈은 반드시 현실로 이뤄질 거고 우리는 사랑을 믿고 영원을 믿고 우리의 이웃도 사랑과 행복을 의심치 않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으면 외로울 테지.
내가 이리 살아가고 있듯이 당신도 여태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 테니.
오늘도 꿈을 꾸는 기다림의 연속이지만 내가 나를 포기하지 않는 한 나의 모든 꿈은 그렇듯 현실이 되고 말 테니.
오늘이 지나서 내일은 더욱 우리가 가까워질 테니. 우리의 미래를 희망으로 낙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