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다 추억하다
타박타박 떨어지는 빗소리에 하루 종일 정신없이 잠만 잤어. 길지 않은 하루 24시간 동안 내가 깨어있었던 시간은 불과 다섯 시간 남짓. 뭔가에 쫓기듯 잠이 들었고 숱한 꿈을 꾸었지.
꿈이 늘 그렇듯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지만 꿈꾸고 있던 시간만큼은 지루하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어.
지금은 자정이 넘은 시간. 늘 그렇듯 전화벨 소리에 이불을 한 번 들췄다가 몽롱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멍하게 어둠을 응시하다 침대에 다시 누었어.
그런데 다시 꿈을 이어가지 못할 걸 알자 시간이 금방 고통스럽게 다가오고 그래서 난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어. 그리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을 나의 고통을 정말로 끝내고 싶어. 더 이상 아무에게도 울면서 내 사랑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지 않기를.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겨울날이었지.
"세상이 너무 따뜻하지 않니? 살아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해."
커다란 함박웃음으로 다가온 한 남자가 총기 잃은 내 눈앞에 아른거려.
캔의 '겨울이야기'였나?
"처음 만난 그때를 기억하니. 유난히 외롭던 그 겨울에 새 하얀 눈꽃 같은 미소로 내게 다가온 널 기억해. 너의 작은 두 손이 시려울까. 내 주머니 속에 넣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큰 기쁨 내게 축복 같은 너인데."
사랑도 운명도 모두 하찮은 미혹이라고 했던가. 은희경은 그렇게 말했지. 가소로운 허구인 사랑을 치장하기 위해 운명이라는 말로 미화한다고. 운명이라는 건 없다고. 운명적이라는 해석은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지.
무료함에 지쳐있었어. 뭔가에 바쁘고 지치고 싶었어. 낯선 것에 나를 내몰고 싶었어. 난생처음 해 보는 육체노동. 왜 그렇게 힘이 들었었는지. 내 삶에 이런 경험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고통스러웠다.
처음 그곳에서 일을 하던 날, '겨울이야기'를 들었지. 나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가사. 근데 이 노래가 마음에 와닿았어.
사실 뒷부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그때부터 이 노래만 들으면 즐거웠고 테이프가 빨리 돌아 노래가 다시 흐르길 기다렸어. 목소리 하나에 엉뚱한 노래를 좋아하게 된 거야. 정말 나와는 조금도 맞지 않은 노래를.
그곳에서 일을 하던 2달 남짓한 기간.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이 노래를 들었어. 이 노래는 지친 나를 깨우는 활력소였어. 그리고 마법과 같은 노래였지. 꿈같은 가사를 현실로 이루어줬으니까.
한 남자를 알게 되고 그 남자가 나에게 전화를 했지. 그때 그의 목소리 곁으로 희미하게 '겨울이야기'가 들렸어.
놀라서 엉겁결에 "어!" 이렇게 내가 소리쳤고 그 남자가 이리 말하더군. 꼭 우리 이야기 같지 않냐고. 처음 나를 보던 날.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고. 볼륨을 높이자 곡의 클라이맥스가 흘렀고 옆에 친구가 있는지 장난스러운 그들의 목소리도 전해지더군.
"세상을 다 가진 듯 큰 기쁨... 내게 축복 같은 너인데... 함께 할 너와 나의 겨울은 하얀 눈보다 투명한......"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행복했던 그와의 시간들이 모두 선명히 떠올라.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서먹한 모습.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계속 눈으로 나를 쫓아가던 모습. 술이 조금 취한 발그레한 얼굴로 계산을 하면서 창피한 듯 "왜 웃으세요?" 하던 모습. 나에게 장난을 거는 남자들을 몹시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던 모습.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그의 전부였어. 그런데 보다 긴 시간 동안 그는 내 전부가 돼 버렸다. 내가 그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그 사랑으로 이토록 아파할 줄 정말 몰랐다. 정말 난 아무것도 몰랐어.
아득한 꿈에서 가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덥히고 내 눈을 키웠던
기꺼운 말소리 하나에도 내가 행복했던 한 남자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순수한 사람이었으면. 꿈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었으면. 조건보다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언젠가 내 성화에 많이 머뭇대며 수첩에 적힌 말들을 읽어줬어. 내 이름도 모르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점점이 이어졌어. 어느 겨울, 그의 수첩에 난데없이 등장한 한 아가씨가 나였어.
"좀 어렵지만 괜찮은 아가씨야."
그는 나에게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어.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 이 영화만큼은 친구와 보지 않았지. 내가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내 삶에 낯선 감정을 드리우며 스며든 한 남자. 나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한 한 남자.
내가 남자를 사랑했어. 믿기지 않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어. 나 자신보다도 소중한 타인이 나에게 생겨버렸어. 내가 변했어. 나의 모든 게 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