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가을, 린에게 보내는 회상

기억하다 추억하다

by dropfairy

타박타박 떨어지는 빗소리에 하루 종일 정신없이 잠만 잤어. 길지 않은 하루 24시간 동안 내가 깨어있었던 시간은 불과 다섯 시간 남짓. 뭔가에 쫓기듯 잠이 들었고 숱한 꿈을 꾸었지.


꿈이 늘 그렇듯 명확하게 기억나는 건 하나도 없지만 꿈꾸고 있던 시간만큼은 지루하지 않았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내고 싶었어.


지금은 자정이 넘은 시간. 늘 그렇듯 전화벨 소리에 이불을 한 번 들췄다가 몽롱한 목소리로 전화를 끊고 멍하게 어둠을 응시하다 침대에 다시 누었어.


그런데 다시 꿈을 이어가지 못할 걸 알자 시간이 금방 고통스럽게 다가오고 그래서 난 습관처럼 컴퓨터를 켰어. 그리고 너에게 편지를 쓴다.

이 편지를 마지막으로 나의 사랑을 나의 고통을 정말로 끝내고 싶어. 더 이상 아무에게도 울면서 내 사랑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지 않기를.






입김이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겨울날이었지.


"세상이 너무 따뜻하지 않니? 살아있다는 게 너무나 행복해."


커다란 함박웃음으로 다가온 한 남자가 총기 잃은 내 눈앞에 아른거려.


캔의 '겨울이야기'였나?

"처음 만난 그때를 기억하니. 유난히 외롭던 그 겨울에 새 하얀 눈꽃 같은 미소로 내게 다가온 널 기억해. 너의 작은 두 손이 시려울까. 내 주머니 속에 넣을 때면 세상을 다 가진 듯 큰 기쁨 내게 축복 같은 너인데."

사랑도 운명도 모두 하찮은 미혹이라고 했던가. 은희경은 그렇게 말했지. 가소로운 허구인 사랑을 치장하기 위해 운명이라는 말로 미화한다고. 운명이라는 건 없다고. 운명적이라는 해석은 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지.





무료함에 지쳐있었어. 뭔가에 바쁘고 지치고 싶었어. 낯선 것에 나를 내몰고 싶었어. 난생처음 해 보는 육체노동. 왜 그렇게 힘이 들었었는지. 내 삶에 이런 경험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몸이 고통스러웠다.


처음 그곳에서 일을 하던 날, '겨울이야기'를 들었지. 나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가사. 근데 이 노래가 마음에 와닿았어.


사실 뒷부분을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던 거야. 그때부터 이 노래만 들으면 즐거웠고 테이프가 빨리 돌아 노래가 다시 흐르길 기다렸어. 목소리 하나에 엉뚱한 노래를 좋아하게 된 거야. 정말 나와는 조금도 맞지 않은 노래를.

그곳에서 일을 하던 2달 남짓한 기간. 하루에 한 번 이상 꼭 이 노래를 들었어. 이 노래는 지친 나를 깨우는 활력소였어. 그리고 마법과 같은 노래였지. 꿈같은 가사를 현실로 이루어줬으니까.





한 남자를 알게 되고 그 남자가 나에게 전화를 했지. 그때 그의 목소리 곁으로 희미하게 '겨울이야기'가 들렸어.


놀라서 엉겁결에 "어!" 이렇게 내가 소리쳤고 그 남자가 이리 말하더군. 꼭 우리 이야기 같지 않냐고. 처음 나를 보던 날.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고. 볼륨을 높이자 곡의 클라이맥스가 흘렀고 옆에 친구가 있는지 장난스러운 그들의 목소리도 전해지더군.


"세상을 다 가진 듯 큰 기쁨... 내게 축복 같은 너인데... 함께 할 너와 나의 겨울은 하얀 눈보다 투명한......"

그 남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행복했던 그와의 시간들이 모두 선명히 떠올라.


처음 문을 열고 들어오던 서먹한 모습. 자리에 앉으면서부터 계속 눈으로 나를 쫓아가던 모습. 술이 조금 취한 발그레한 얼굴로 계산을 하면서 창피한 듯 "왜 웃으세요?" 하던 모습. 나에게 장난을 거는 남자들을 몹시 불쾌한 눈으로 쳐다보던 모습.


비록 짧은 순간이었지만 난 그의 전부였어. 그런데 보다 긴 시간 동안 그는 내 전부가 돼 버렸다. 내가 그를 그토록 사랑하게 될 줄 그 사랑으로 이토록 아파할 줄 정말 몰랐다. 정말 난 아무것도 몰랐어.



아득한 꿈에서 가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덥히고 내 눈을 키웠던

기꺼운 말소리 하나에도 내가 행복했던 한 남자



"처음 만난 날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순수한 사람이었으면. 꿈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담배를 안 피우는 사람이었으면. 조건보다는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언젠가 내 성화에 많이 머뭇대며 수첩에 적힌 말들을 읽어줬어. 내 이름도 모르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점점이 이어졌어. 어느 겨울, 그의 수첩에 난데없이 등장한 한 아가씨가 나였어.


"좀 어렵지만 괜찮은 아가씨야."


그는 나에게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했어.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 이 영화만큼은 친구와 보지 않았지. 내가 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내 삶에 낯선 감정을 드리우며 스며든 한 남자. 나 역시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한 한 남자.


내가 남자를 사랑했어. 믿기지 않은 일이 나에게도 일어났어. 나 자신보다도 소중한 타인이 나에게 생겨버렸어. 내가 변했어. 나의 모든 게 변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