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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담백하게 Jan 29. 2023

정원

한 여름의 정원 풍경



처음을 생각하면 정원은 많이 달라졌다. 아무것도 없는 흙밭에는 작은 농막이 놓였다. 그 결심을 시작으로 마당에는 잔디를 심고 결을 나눠 꽃이며 나무를 심었다. 볕이 좋아 잔디는 자리를 잘 잡았고 나무들도 별 탈이 없었다. 겨울을 제외하면 계절마다 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아직 빈 부분이 여전하지만, 이제는 제법 정원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정돈돼 가는 정원은 아름다웠다.


주말이면 부모님은 부지런히 시골을 다녀오셨다. 이번에는 무슨 꽃을 무슨 나무를 심었다. 담장을 수리했다. 컨테이너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놈의 잡초들……. 시골이란 항상 할 일이 넘치고 부지런하지 못하면 금방 티가 나는 곳이었다. 게으른 아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생활이었다. 그래서 정원에 관해 아주 타인처럼 굴었다. 아주 간혹 중량감 있는 일이 있어 불려 가면 그렇게 시간이 아까웠다. 그리고 다음 날은 근육통에 종일 누워있어야 했고.


뒤늦게 밭일에 정원까지 몸이 성하지 않은 부모님을 마주하게 됐다. 그러면 이 불속성 효자는 ‘그놈의 땅, 그놈의 땅’ 거리면서 도움도 안 되는 게 옆에서 화만 부추겼다. 은퇴가 코앞인 부모님이었다. 그렇기에 뒤늦은 시골 일은 당신들의 욕심이라 생각했다. 그 욕심에 덩달아 내가 피해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어쩌다 한 번도 그렇게 귀찮아하던 놈. 이래서 아들놈은 쓸데가 없다.



우리 집에 놀러오는 윗 집 개, 대박이와 연두



한 달 혹은 두 달에 한 번. 삽질을 하거나 돌을 나르거나 땅을 파거나 혹은 메우거나. 마뜩잖은 아들을 불러낼 정도면 일은 보통 중차대했다. 그만큼 고된 노역을 겪어야 했고 손발이 떨릴 만큼 몸은 녹초가 됐다. 일은 해가 뜨면 시작했고 해가 질 때야 끝이 났다. 시골의 생활은 무릇 그러했다. 차가운 음료를 마시고 해가 지는 정원을 멍하니 바라본다. 곧 어머니는 저녁을 차려주신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지만 기어코 고봉밥을 맛있게 비운다. 그리고 어둔 밤 차를 끌고 부모님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여덟 번, 정원으로의 지속적이며 간헐적인 방문. 자주 보지 않는 시차만큼 정원은 볼 때마다 새롭고 풍성해졌다. 가보면 담벼락을 따라 모르던 장미가 심겨 있고, 나중에 따 먹을 거라며 블루베리 나무가 몇 그루 생겨있기도 하고, 어떻게 하신 건지 대문에는 작은 가로등이 솟아있기도 했다. 그 아주 느린 변화는 놀라웠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 부모님의 노고는 감격스러웠다. 두 분을 의심했던 나는 부끄러웠다.



타는 것 같이 새빨간 블루베리 잎



새롭고 빠른 걸 좋아한다. 지겨운 건 참지 못하고 그만큼 끈기도 부족하다. 당장의 즉각적인 반응을 선호한다. 이런 성향은 점점 더 심해졌다. 예를 들어 이제는 영화 한 편도 진득하니 보질 못한다. 거기서 더해 10분짜리 유튜브도 벅차서 1.5배속으로 본다. 그렇게 대부분에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것처럼 생활은 정신이 없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요점 없이 마구 요동만 쳤다.


하루의 성과는 한 달 뒤, 혹은 한 분기 뒤, 어쩌면 일 년 뒤까지. 땅의 시간은 느렸다. 나와 너무나 상대적인 시간의 속도. 시간은 너무 느려 마치 물리적으로 흐르는 게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온몸이 아득해질 때까지 반복되는 노동은 결국 그 시간을 따라잡게 도와줬다. 땅을 고르다 시원한 냉수를 마시고, 벽돌을 올리다 간이의자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고, 꽃을 심고 꽃을 보고 그러다 그날따라 파란 하늘을 우러러본다. 그러자 내 정신없는 타이머를 멈추고 이(異) 세계에 랜딩 할 수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이곳 시간에 내 시계를 맞춰 놓았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첫 여행을 시작할 때 들던 느낌이다. 


나는 홀로 정원을 찾아 하루를 지내고 온다. 두어 번 친구들과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결국 이번에도 부모님 노고의 혜택은 내가 누리는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들놈은 쓸데가 없다. 목공을 배우려 한다. 작은 온실을 지어드릴 생각이다. 부끄럽게도 이제야 삶을 지어낼 용기가 생긴다.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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