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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Apr 24. 2020

사냥의 시간을 봤다.

별로였다.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윤성현 감독의 전 작품인 「파수꾼」을 기억하는 사람에겐, 「사냥의 시간」이 큰 기대를 줬으리라 생각한다. 전작과 같은 배우가 4명이나 출연하고, 첫 작품인 「아이들」에서부터 다루는 우정을 중점으로 펼쳐질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개봉이 미뤄지고, 넷플릭스로 넘어가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오늘(4월 23일) 오후 4시에 개봉했다. 영화 「사냥의 시간」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2시간 동안 우리에게 의아함을 안겨줬다.    

  


 영화는 일종의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토대로 진행한다. 현금 가치가 폭락해서 환전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세상이고, 사람들은 비상식적 구조조정에 시위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경찰의 윗선에 말 한마디 하면 잡혀도 풀려 나오는 곳이다. 이런 세상에서 준석, 장호, 기훈은 전과자라 어디에 제대로 취업도 하지 못하고, 그나마 취업을 했다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불법 도박장에서 일하는 상수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선택하는 일은 “한 번만 더 마지막으로” 절도(竊盜)다. 이미 절도 행위로 교도소에 다녀온 전력이 있는 준석이 한 번 더 절도를 선택하는 이유는, 교도소에서 만난 형님의 제안 때문이다. 대만에 오기만 하면 자신이 자리 잡게 도와준다고 20만 불만 들고 오면 된다고 말한다. 20만 불 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형님이 밀수업뿐만 아니라 “자전거 렌트, 자동차 임대업, 식당, 상점” 등의 일도 하는데, 한 달에 8,000불 이상의 수입이 난다고 한다. 그 가게 중 하나를 싼값에 넘긴다는 조건과 하와이랑 다를 바 없는 그림 같은 곳에 집도 하나 구할 수 있다.

 이런 배경 아래에 서사가 진행되는데, 문제는 디스토피아 세계관이 무슨 상관인가 싶을 정도로 배경과는 연관이 없어 보이는 서사다. 준석이 얘기하는 절도를 해야 하는 이유에 한국의 상황이 심각하므로 외국에 가야 한다는 얘기는 없다. 준석과 친구들은 지옥인 이곳에서 벗어나 멋있게 살고 싶을 뿐이다. 그들은 한국을 계속해서 지옥이라고 표현하지만, 지옥이라기엔 절도 이전까지 그들은 술 먹고, 도박장에 가고, 자동차도 있다. 그러면서 '당장 다음 달에 월세 낼 돈이 없어서 쫓겨나야 한다', 그리고 '사람답게 살자'고 말하면, 말의 앞뒤가 안 맞는다. 만일 그들이 정말 어쩔 수 없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배경이 되는 사회적 문제와 연관해서 연민, 혹은 동정심이 생겼겠지만, 작중엔 그런 감정을 느낄만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도리어 총을 들고 사진을 찍는 모습과 잦은 욕설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들 수 있는 연민마저 사라지게 만든다.


 영화에는 굉장히 이상한 상징들이 등장한다. 자신이 목표로 한 사람의 귀를 자르는 한을 먼저 살펴보자. 왜 다른 신체 부위도 아니고 하필 한쪽 귀일까? 귀를 자르고 살려주는 것도 아니고, 귀를 자르고 죽이는데, 귀를 챙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준석을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5분 동안 최대한 멀리 도망칠 기회를 준다. 이후 왜 계속 쫓아오냐는 말에 “시작을 했으면 끝내야죠.”라고 답한다. 이렇게 보면 귀를 자르는 행위는, 단지 자신이 이만큼의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의 다름이 아니다. 그럼 귀일 필요가 있는가? 차라리 「타짜」의 아귀처럼 손목이라면 이해라도 간다. 하지만 귀를 가져가는 이유를 설명할 만한 장면은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윤성현 감독의 이전 필모그래피에선 우정이 가지는 의미가 서사 진행의 중요한 매개로 사용된다. 이번 영화 역시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우정이라고 부르기엔 모호한 부분이 여럿 존재한다. 상수가 합류하는 장면은 준석의 협박에서 시작되고, 그의 시선 처리는 부자연스러운 모습이 보인다. 이것이 확실해지는 장면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준석, 장호, 기훈을 바라보는 장면일 것이다. 이 장면은 기훈이 장호와 얘기하는 장면에서 아파트 밖의 사람들을 보는 장면과 유사하게 보이는데, 마치 남의 일을 보는듯한 느낌을 준다. 우정을 수면 위로 올리기 위해 사용하는 방식은 부모의 부재다. 기훈을 제외하고 장호와 준석에겐 부모가 존재하지 않는다. 딱 영화의 중간 지점에 기훈이 부모님과 헤어지는 장면을 배치하고, 준석이 장호에게 “나랑 기훈이가 가족이지(여기서도 상수는 지워졌다).”라는 말을 뱉는다. 이 대사를 통하여 그들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이고, 끈끈한 우정으로 연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 가족의 모습은 가부장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버지가 결정하면,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따라가야 하듯, 한 명이 정하면, 나머지는 그것을 따라와야 한다.

 준석이 가부장적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려지는 이유는, 영화 처음에 등장하는 준석의 막무가내 정신과 장호와 기훈, 상수가 가지는 부채의식 때문이다. 준석이 감옥에서 들은 얘기를 하자 장호와 기훈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준석은 담배를 태우며 “맘에 안 드냐?”라는 말을 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음에 들지.”라는 말을 한다. 부채의식이 넘쳐흐르는 그들에게 이 말을 거부할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후 그들은 준석이 돈 훔친다고 교도소에서 3년 있었는데, 말 들어줘야겠다는 장호의 대사는, ‘아버지가 뼈 빠지게 밖에서 고생하는데, 아버지 말 잘 들어야지.’라는 과거 가부장제의 테제로 대체된다. 고아로 세상에 던져진 장호에게 준석은 아버지 같은 존재일 수도 있고, 혹은 남편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자신을 위해 희생했다는 것만으로, 그가 무슨 일을 하든 무조건 도와줘야 한다는 명제가 머리에 깊이 박혀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과거 한 방 살이를 했던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듯, 기훈이 “우리도 이제 각방 좀 쓰자”라는 대사를 뱉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에선 이전에 쓰였던 ost와 다르게 피아노 멜로디가 흘러나옴으로써,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오는 옛 가정집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냥의 시간」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자. 그들이 돈을 사냥하는 시간은 5분 남짓이었지만, 사냥당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이틀 정도가 소요된다. 사냥하는 장면도 몇 분 안 나오지만, 사냥당하는 장면은 사냥 이후 모든 장면이다. 제목 앞에 이런 괄호(한 이)가 숨겨져 있다고 본다. 다만 이 영화는 사냥하는 사람의 시점이 아닌, 쫓기는 사람의 시점에서 서사를 진행하여 복수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그려낸다. 이 영화가 넷플릭스에 나와서 다행이다. 시간을 내서 영화관에 간 다음, 돈을 내고 봤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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