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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Mar 16. 2020

마시기 어려운 커피

아직도 블랙은 씁디다.


봄이 오는 중입니다.

한적한 아침, 엄마와 케냐 AA와 에티오피아 원두를 갈아 마시며 핸드 드립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 "자. 이제 우리가 커피 원두를 다 갈았지? 이때 원두 향기를 Fragrance라고 해. 그리고 이제 원두에 중심부에 잠시 물을 부을게. 이때 느껴지는 향을 Aroma라고 한단다. 이제 물이 필터 밑으로 천천히 내려가는 게 눈에 보이지? 그리고 표면에 균열이 가기 시작할 거야. 이때 물을 부으면, 이렇게 거품이 올라온단다." 엄마가 바리스타 강사가 된 것은, 아버지는 외국에 있고, 형과 나는 자취를 하기 시작한 때였다. 엄마는 34평의 집에 혼자 있어야 했고, 갓 스물한 살, 스무 살이 된 형과 나는, 그런 엄마의 외로움보다 친구들의 외로움을 소주 한 잔과 맥주 한 잔으로 털어 넘겼다. 엄마의 전화가 자주 올 때, 나는 엄마가 많이 외롭다는 걸 느꼈고, 이후 대학생활 내내 주말마다 집에 갔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나의 20세가 끝날 무렵, 엄마가 커피뿐만 아니라 미술 심리 상담, 풍선 만들기, 플라워 아트를 배운다는 걸 알게 됐다. 외롭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마는 고독했을 것이다. 가족이 있지만 외롭고, 혼자가 아님에도 혼자 있다고 느낀다는 건, 정말 가슴 아픈 일이다. 내가 사회 복무 요원 생활을 하면서 2년 동안 집에 있자 엄마는 굉장히 기뻐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엄마랑 많은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케케묵은 얘기부터 시시껄렁한 얘기까지 말이다. 하지만 내가 들은 얘기는, 이때까지 몰랐던 우리 집의 가정사였다. 아버지가 친구들과 진행했던 사업을 말아먹어 빚이 생겼다는 거, 그래서 엄마와 나는 매일 김치전과 국수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거, 거기다가 고모가 사기를 당해서 아버지가 칠레에 갔다는 얘기까지. 엄마는 말 끝마다 나에게 '못 해줘서 미안하다'라는 말을 붙였지만, 도리어 난 왜 엄마는 이 모든 걸 혼자 짊어졌는지 몰랐다. 엄마는 만약 네가 이걸 알았다면 네가 꿈을 포기하고 다른 걸 할 것 같아서 말하지 못했다고 말하셨다. 정작 엄마는 자기 꿈을 포기하고 모든 걸 희생하셨지만 말이다.
 "자. 이제 마셔봐. 이제 입 안 가득히 느껴지는 맛과 향이 있을 거야. 이걸 Flavor라고 해" 원두를 곱게 갈았을 때 느껴졌던 신 향보다는 묵직한 느낌이 입 안 가득히 퍼졌다. 이제는 지역에서 유명한 커피 강사인 엄마지만, 엄마는 아직도 소정의 돈만 받고 중학생과 고등학생, 할머니들을 위해 교육을 나간다. 예전에 엄마의 동네 친구분 병문안을 갔을 때,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네 엄마 같이 미련하게 착한 사람은 없다. 돈 관리는 또 어디서 배웠는지, 너네 고모집 빚도, 너네 집 빚도 다 엄마가 갚은 거야. 진짜 감사하며 살아야 돼. 넌." 사서삼경을 읽었지만, 그리고 이름에 효도 효자가 있지만, 효도는 나에게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었고, 하필 내가 하고 싶은 일은 21세기에 사람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철학이었으니까.
 "엄마. 커피가 너무 써. 차라리 맥심 커피랑 초코파이 먹을래." "그 나이를 먹고 아직도 그것들을 입에 달고 사니? 26세 맞니 너?" 사회 복무 요원 시절, 엄마는 중학교 시절 생일날에 케이크를 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한 적 있었다. 그날 기억은 무척이나 선명하다. 학교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엄마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아버지는 외국에 있고, 형은 숙소에서 운동을 하니까, 생일은 엄마와 둘이서 저녁을 먹고 저녁에 아버지와 통화를 하면 됐다. 저녁 시간쯤 돌아온 엄마는 김치볶음밥에 계란 2개를 얹고는 케첩으로 하트를 그려줬다. 난 김치와 애호박 밖에 없는 그 김치볶음밥이 너무 맛있었고, 이후 엄마가 초코파이 5개로 만들어 준 케이크도 너무 좋았다. 친구들은 왜 케이크를 먹지 않았냐고 물었지만, 난 그것이 더 좋았다.
 마시기 어려운 커피를 마시며 엄마와 앉아서 청약 저축을 얼마나 모았고, 적금을 얼마나 들었는지 따위를 얘기했다. 엄마는 "서울에서 공부를 더 해도 괜찮으니까, 공부하고. 이젠 네가 알아서 해야 할 것이 많을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딱 10년 전 식탁 위에선 할 수 없는 얘기를 나누는 오늘이 난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친구들과 술자리에 가면 난 내 인생은 이미 성공했다고, 더 큰 성공은 없을 거라고 말한다. 애들은 그런 나를 보고 정말 오만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제 엄마와 나는 집에서 맥심이 아닌 원두커피를 마셔도 되고, 김치볶음밥에 삼겹살을 넣어 먹어도 된다. 그거면 충분히 큰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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