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키에르케고어의 얘기의 핵심은 나를 무한성과 유한성으로 구분하는 것 또한 나이고, 동시에 분별을 없애서 자유 및 결단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나라는 점이다. 키에르케고어는 우리는 늘 자유와 결단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함을 강조한다. 자기의식적 결단의 순간에 정신은 ‘시간의 흐름에 종속된 실재’와 ‘미래에 나타나는 영원한 이상’을 종합한다. 감히 상상력을 더하여 글을 해석하자면, 실재(existence)를 곧 존재라 하고, ‘미래에 나타나는 영원한 이상’은 곧 신을 만남이라 한다면, 이 순간에 신을 마주함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그가 말했던 다음 논의로 넘어간다면, 훨씬 더 이해가 쉬우리라.
“가능성은 자기에게 더욱 커 보인다. 많은 것이 가능해진다……그러나 인간적으로 말해서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인간이 극단에까지 이르게 되고서야 비로소 진지한 결단이 나온다.” 앞서 말했던 결단이 나오는 상황은 우리가 가능성을 상실해버린 순간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신에게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그다음에 문제는 그가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즉 인간의 무한성은 자기 스스로 실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런 생각은 개인을 심연 끝자락으로 잡고 간다. “무모한 인간은 이런저런 가능성이 있는 위험 속으로 돌진한다. 그런데 그것에 닥치면 그는 절망하고 파멸한다. 믿는 자는, 인간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파멸을 목격하고 또 이해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는 믿는다. 이런 까닭에 그는 파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구원될 것인가 하는 것을 전적으로 신에게 맡긴다. 다만 그는 신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
키에르케고어의 얘기에서 우리가 추론할 수 있는 것은 믿음 없는 인간은 곧 파멸, 그러니까 지옥에 간다는 말일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인간은 선험적인 조건인 시간을 넘어설 수 있다. 신은 늘 언제나 현재에 많은 고통을 준다. 40년 동안 광야를 떠돌게 하거나, 자신의 친인척으로부터 쫓겨나게 하거나, 자기 아들을 죽이게 하거나. 그가 “한 사람이 개인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가 아니라 그가 어떻게 행하는가에 달려 있다”라는 말은 비로소 완성된다. 우리의 행동은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라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가능한 신의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의문점은 키에르케고어가 결단의 순간에 “정신은 시간의 흐름에 종속된 실재와 미래에 나타나는 영원한 이상을 종합”한다는 말에서 믿음의 위치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글에서 믿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일상적인 정보에 관한 것이 아니라, 특수 형이상학에 속한 신과 관계한 것이므로, 이것의 영원성은 담보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교회에서 내거는 교리와 글에서 나오듯 믿음은 영원이 아닌 ‘순간’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시간의 흐름에 종속된 실재가 영원한 이상과 종합된다면, 그것의 매개가 되는 믿음은 영원성을 가지지 못하는가? 여기서 말하는 종합이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의 개념이라면, 믿음은 영원이라는 속성을 가지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지만, 칸트가 말하듯 지식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의미는 달라진다. 칸트가 특수 형이상학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라는 말만 하고 그것을 논증하지 않았듯이, 믿음은 영원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가능성을, 이전 믿음이라는 개념에 추가할 수 있으니까.
이 길로 빠지면 결단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어진다. 신과 함께한다는 생각이 곧 오만이요, 이후 나태로 빠질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그는 종합이라는 개념을 도대체 어떻게 쓴 걸까? 종합한다라는 말의 프랑스어에서의 의미는 연결하다, 겸비하다, 동시에 갖추다는 뜻이 나온다. 여기서 종합이라는 말은, 자기의식적 결단이 곧 믿음이므로, 믿음을 통하여 신과 연결될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출처 : 『죽음에 이르는 병』, 『공포와 전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