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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Feb 25. 2020

늙어감에 대하여

「우연의 인정 」, 「시간과 유한성」 정리. 

대전시립미술관의 오래된 커피 자판기. 2019.11.30




오도 마르크바르트라는 철학자를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거라 여겨진다.  조창오 교수가 번역한 『늙어감에 대하여』를 읽기 전에 적잖이 당황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 마르크바르트에 관한 책이 없어서  『늙어감에 대하여』 읽으면서 그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책은 생일에 대한 회의로 시작한다. 우리는 생일을 왜 축하하는가? 혹은 언제까지 태어남을 축하해야 할까? 태어남에 대한 얘기와 맞닿아 있는 것은 죽음이다. 늙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는 말이고,  이것을 인식하는 순간, 하이데거의 말처럼 현존재(Dasein) 임을 느낄 것이다. 서문에서 하이데거적인 느낌이 강하게 나는 이 책의 내용은, 해가 지날수록 늘어 나는 촛불 수가 보여주는 늙어감에 대한 마르크바르트의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나의 생각은 어느 정도 맞았지만, 마르크바르트는 생각보다 멋있는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책 곳곳에서 굉장히 에포케(epochē)를 잘 지키는 대목을 보여준다. 자신이 논증할 수 있는 만큼만 적고, 그 이상은 적지 않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중 재밌었던 두 파트를 오늘 소개하고자 한다. 


「우연의 인정」


「우연의 인정」에서 오도 마르크바르트는 우연을 통하여 철학을 시작한 자신과 회의주의를 통하여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철학적인 고찰은 우연을 없애는 것만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헤겔의 말을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전면적으로 비판한다. 하이데거의 피투성(被投性) 개념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는 우연히 어느 시대에 태어나고, 어느 지역에 태어남을 알 수 있다. 철학을 하는 인간 자체가 우연인데, 철학에서 우연을 없앤다면, 철학에서 철학자를 없앤다는 말이다. 그가 철학을 하게 된 계기도 우연했지만, 그는 우연히도 헬무트 셸스키가 “회의적 세대”라고 일컬은 세대에 속하여 태어났다. 1960년대 서독의 “사후적 불복종(nachträglichen Ungehorsam)”운동은 ‘가책을 가짐(Gewissenhaben)’으로부터 ‘양심적임(Gewissensein)’으로 입장을 변경하면서 비판철학 이후의 역사 철학을 혁명적 아방가르드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과거라고 유죄 판결하면서 자신만이 위대한 구원의 대리인이자 미래라고 주장한다. 이를 우연히 마주한 그는 『역사 철학의 어려움』에서 이를 비판하고, 여기서 그의 유한성 철학이 등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회의는, 우리의 짧은 생을 고려하는 인간 유한성의 철학을 통해 각성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 생을 자율적-원칙적으로 절대화하는 것보다 더 빨리 온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는 절대적 원칙에 비춰 보면 항상 과도하게 우연적이다. 그는 기독교 신학의 우연(Kontingenten)의 유한성 개념(존재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또는 또한 달리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이중적임을 말한다. 이를 통하여 헤겔의 얘기를 비판함과 동시에 “우연은 실패한 절대성이 아니라 사멸성의 제약을 받는 우리의 역사적 정상상태”임을 증명한다. 여기서 그는 『늙어감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단서를 제공하는데, 우연이 가지는 중요성의 경험이 바로 “나이를 먹어감의 경험으로서”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연의 인정」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우연이란, 죽음이라는 유한성을 가진 인간의 역사를 생각한다면 매우 정상적인 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후적 불복종 운동에서 주장하는 ‘위대한 구원의 대리인이자 미래’라는 필연성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과거 철학에서 말하듯 “나”는 세상에 중요한 존재이며, “나”가 없는 세상은 의미 없다는 식의 말은 우연이라는 단어 앞에서 녹아내린다. 여기서 마르크바르트의 얘기를 생각해보면, 철학적 인간학 수업에서 배운 인간론 중 본질론에 좀 더 가깝다. ‘인간은 우연한 존재’라는 말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마르크바르트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까? 


이중적 : 우연은 “또한 달리 존재할 수 있는 것”이고 우리를 통해 변화 가능한 것(예를 들어 이 텍스트는 아예 없었거나 다르게 쓰일 수 있었다), 즉 임의적으로 선택 가능하거나 버릴 수 있는 임의성이다. 또는 우연은 “또한 달리 존재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우리에 의해 변화 불가능하며(운명적 사건 : 예를 들어 태어나는 것), 따라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시간과 유한성」

      

 45분 강의로 이루어진 이 장에서, 마르크바르트는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생의 시간과 세계의 시간』에서 그가 생의 짧음을 중심적인 시간문제로 발전시키는 걸 발견한다. 직접적으로 자명한 “생의 세계”로부터 쫓겨나 파악될 수 없을 정도로 긴 “세계의 시간”을 가진 객관적인 세계를 더 많이 발견하면 할수록 인간은 더욱더 불가피하게 자신의 “생의 시간”이 너무나 짧고, 죽음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세계 시간의 과학적 객관화와 무한화는 요한 밥티스트 메츠의 시간의 “탈기한화(Entfristung)”를 통해 가능하고 필요하게 됐다. 시간은 구원의 시간이자, 구원적 종말로 가는 자신의 목적을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목적 없는 “열린”, 그리고 “진화론적으로 탈기한화된 시간”이 될 수 있었다. 마르크바르트는 메츠의 주장을 “열린”, 탈기한화된 세계의 시간을 현대적으로 발견한 것은 시간의 기한적 특징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를 극단화시킨다는 말로 보충한다. 시간은 무엇보다 “죽음에 이르는 존재(Seins zum Tode)” 철학을 통해 유한하게 됐다. 마르크바르트는 하이데거의 표현을 다른 의미가 아닌 인간의 생의 짧음에 대한 단순한 시간현상학의 표현으로만 관심을 가진다. 그는 이 장에서 ‘각 개별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고 짧다’, ‘기한이 있다’, ‘생은 짧다’ 등의 현상학을 위해 1. 짧은 생 2. 빠름의 강요 3. 보상적 느림 4. 다시간성으로 이를 반성한다.      


1.짧은 생     


  세네카는 『짧은 생에 대해서』란 책에서. 우리 생은 짧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생의 시간을 노력할 가치가 없는 사물들로 인해 마구 써버리기 때문에 생을 짧게 만든다고 한다. 세나카의 얘기는 ‘우리의 시간이 유한하다’라는 것을 전제한다. 시간은 무엇보다 우리의 생의 시간이며,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미래는 우리의 죽음이다. 우리는 이 기한이 있는 시간을 실제로 살아가고, 이 속에서 죽어가야만 한다. 마르크바르트는 “우리는 늦게 오며, 빨리 갑니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인간이 항상 늦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시작점이 태어난 순간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시작은 태아일 때가 아니라 자신의 기억이 형성되는 시기(이런 의미에서 마르크바르트는 “우리는 알부터가 아니라 닭으로부터 시작합니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다. 우리의 죽음은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지체된다 해도 항상 빨리 오므로 인간의 생은 짧다.

 마르크바르트는 생이 우리에게 시간적인 이중적 생을 강요하고, 생의 짧음으로부터 적어도 세 가지 점이 도출된다고 한다. 첫 번째로 우리 시간은 기한이며, 생은 짧으므로 우리는 임의로 오랫동안 기다릴 수 없다. 우리의 미래는 죽음으로 한정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는 서두르고, 변화시키고 개선하며 새로운 것에 빨리 도달해야 한다. 두 번째로 우리 시간은 기한이며, 생은 짧으므로, 임의로 새로운 것을 많이 달성할 수 없다. 우리의 죽음이 아무리 오랫동안 지체되더라도 수많은 새로움의 창조에 비해 너무 빨리 오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우리 시간은 기한이며, 생은 짧으므로, 빠르게 살지 혹은 느리게 살지 선택할 수 없으며 우리는 불가피하게 항상 두 방식 모두를 지녀야 한다. 우리는 빠르게 살고 느리게 살며, 서두르고 지체해야 한다. 세 번째에 드러나는 이중적 생은 미래 추구에 열성이어서 빠르게만 살거나 또는 전승에 지배되어 느리게 사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2. 빠름의 강요     

 

현대 세계는 빠름을 강요한다. 현대 세계는 시간적으로 점점 가속화되는 과정으로 경험된다. 이 세계는 “시간화”를 통해 진보적 세계가 되고, 이 세계의 새로움의 속도는 계속 자라나며 시간 흐름의 속도는 점점 더 증가한다. 헤르만 뤼베는 이를 철학적으로 보여줬는데, 변화속도의 증가는 특별히 현대적인 방법, 말하자면 인간의 느림, 특히 전통적 세계의 방법론적 중립화를 통해 가능해졌다. 진보의 현대화하는 힘은 전통 중립적(traditionsneutral)으로 작동한다.

 현대의 자연과학은(세계를 단일하게 측정하고 실험하면서) 항상 더 빨리 전통에 의존하지 않은 채 검증 가능한 결과를 얻는다. 현대의 진보적 세계는 중립화 세계고, 인간의 느림인 전승된 전통이 점점 더 방법적으로 중립화되면 될수록 진보는 더욱더 빨라진다. 우리는 증가하는 진보의 속도에 맞춰 중립화된 것을 폐기하고 그것을 망각하거나 없애 버림으로써 중립화 세계에서 즐겁게 살아가지 못한다. 시간의 비판자들(우리의 비탄가들과 예언자 카산드라)은 증가하는 분노의 속도에 맞춰 현대 세계를 비난한다. 한쪽은 현대 사회의 빠름을 금지하려 하고 다른 쪽 측면은 느림을 금지하려 한다. 짧은 시간 때문에 빠르게, ‘그리고’ 느리게 살아야만 하는 인간은 두 측면으로 분열되어 있고, 그의 세계는 반쪽짜리 세계가 되고 그의 시간은 반쪽짜리 시간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빠른 인간뿐 아니라 느린 인간의 측면까지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3. 보상적 느림     


 빠른 세계 속에서도 인간은 느려야 하고, 전승에 매여 있고, 친숙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마르크바르트는 어린아이들이 어디서나 지니고 있는 테디베어를 통해 이를 확인한다. 너무나 새롭고 낯선 현실에서 아이들은 확고한 친숙한 대상(테디베어)을 통해 친숙함의 결여를 보상받는다. 현대 사회에서 어른들, 그중 교양에 열심인 이들은 자신만의 테디베어인 고전을 필요로 한다. 미래가 점점 빨라질수록 우리는 테디베어와 같은 과거를 미래로 함께 가져가야만 하고, 이를 위해 더욱더 옛것을 배우고 보존해야 한다. 현재는 어떤 시대보다 전승이 많이 망각되고 폐기되지만, 이전의 시대보다 더 많이 전승이 기억되고 존경의 자세로 보존된다. 인간은 변화가 가속화되어 점점 더 비연속적이 되어 가는 현대 세계에서 자신의 연속성을 보호해야만 한다. 여기서 역사적 감각이 탄생하며, 역사적 감각이란 연속성, 느림에 대한 감각이다. 이는 또한 미적인 감각이고, 미적인 감각은 현대 세계의 증가하는 빠름을 보상한다. 현대 세계의 미적 예술에서 포기할 수 없는 새로움의 창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예술이 오랫동안 감성에 영향을 미치고 방향을 지시한다는 점(예술작품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면 우리는 이 작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거나, 또는 매우 느리게 다시 벗어날 수 있다)이다. 

 현대의 빠른 합리화 과정을 위해 중립화되는 전통 또한 현대 세계에서 다양한 형태(다문화적으로) 개인에게 친근하게 현존한다. 전통 가운데 오래된 습관들은 특별한 장점을 지니는데, 새로움의 빠른 속도를 지닌 세계에서 오래된 생활 형식은 적어도 적응력을 지닌다. 진보의 속도는 인간의 느림에 봉사하며, 빠른 사람은 시간을 얻는다. 이 시간을 통해 인간은 느리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의 시간을 사용할 수 있다. 최신의 것이 더 빠르게 낡은 것이 되면 될수록 낡은 것은 더욱더 빨리 최신의 것이 되므로, 우리는 현대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속도가 더 빠르면 빠를수록 동시에 역사를 차분히 반추하며 세계 진행이 뒤에서부터 흘러와 최신의 것으로 우리에게 다시 오길 기다린다.      

 

4. 다시간성     

 

마르크바르트는 인간이 빠르게 산다는 점과 인간이 계속 느리게 산다는 점을 통하여 시간적 분열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그는 시간적 분열은 제거되어선 안 되며 개별 인간을 이를 견뎌내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이중적 생은 인간적 시간의 유한성, 기한 있음을 통해 강요된다. ‘인간은 시간적인 결여 존재이며 그의 시간적인 제1경험은 희소성의 경험이다’라는 명제가 시사하는 바는 “죽음으로 향해가는” 인간은 자신의 시간이 희소하다고 경험한다는 말이다. 그는 시간이 희소하다고 경험하는 이유는 인간의 생이 단순히 짧기 때문이 아니라 무엇보다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는 한 번뿐인 출생과 맞이해야 할 한 번뿐인 죽음 사이에서 오로지 한 번뿐인 생을 이 세계에서 살기 때문이다. 누구나 오로지 한 번뿐인 생의 시간을 가진다. 시간의 짧음이 아니라 생의 시간의 유일성 때문에 우리의 시간은 유한하다. 

 세계에는 나 자신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개별자들과 타자들, 동료들(Mitmenschen)이 있으며, 이들이 여럿이므로 여럿의 생과 여럿의 생의 시간을 가진다. 우리는 타자의 생과 생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의 생과 이들의 생의 시간을 공유하게 된다. 이들과의 소통은 우리의 시간 결여를 보충하는 것으로서, 우리 생이 한 번 뿐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사는 기회를 제공하며, 여럿의 생의 시간을 체험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타인의 생의 시간과 나의 생의 시간이 엮이게 되면 이는 나의 짧은 시간을 좀 더 확장시킨다. 우리는 생의 복수화로서 이러한 우리 생의 시간의 복수화를 필요로 한다. 이를 우리의 동료로부터 얻는데, 이를 동료적 다시간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다시간성은 인간성을 상승시킨다. 우리가 시간을 구원의 시간 및 그의 대체물로부터, 그리고 세계 시간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의 유한한 생의 시간으로부터 이해하는 한, 시간의 통일성(Einheit)보다 동료적 다시간성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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