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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더락 May 26. 2020

르네 마그리트 특별전을 봤다. 나쁘진 않았다.

40분짜리 영상은 다 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마그리트의 그림.

"내 작품은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시각적 이미지이다 : 작품들은 미스터리를 만들어내는데, 실제로 내 작품을 본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냐?'라는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미스터리도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냥 알 수 없는 것이다." - 르네 마그리트. 


 위에 적힌 마그리트의 말은, 그의 작품을 보는 우리에게 생각할 지점을 던져준다. 그는 자신의 작품 속 의미를 “알 수 없음”의 영역에 배치한다. 알 수 없다는 것은, 우리의 질문을 보류하게 만들고, 회의주의자들이 뱉던 “에포케(epoche)”를 연상하게 한다. 질문을 보류하기 위해서 선행되는 것은 사유하는 과정이다. 이번 전시회는 우리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만드는가? 그리고 어떤 지점에서 질문을 멈추게 하는가?      

 이번 전시회의 작품들은 모두 진품이 아닌 축소 모조품이다. 그리고 영상을 통하여, ‘만약 마그리트의 그림이 움직였다면 ~했을 것이다’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모조품 전시의 경우 검은 벽면과 그림 뒤에 은은하게 나오는 불빛을 배치하여 전시했고, 영상의 경우 벽면 전체를 활용하거나, 벽면의 한 면만을 활용하여 보여준다. 먼저 모조품에 관하여 얘기하자면, 그림 뒤에 빛을 배치함으로써, 『빛의 제국』 작품에 관하여 생각하게 만든다. 낮에 열린 전시회지만, 태양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에 들어옴으로써, 우리는 밖의 시간과 단절된다. 어두운 벽면은 밖과 전시회장의 차이를 극명하게 만들며, 그림 뒷면에 비치는 작은 불빛은 작품을 감싸는 형태로 그려져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게 하고 한 작품에만 시선을 두게 만든다. 이를 통하여 모조품 전시 구간은 탈문맥화와 재 문맥화를 제대로 구성했다.

 영상의 경우 좀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상이 나오는 공간은 공통으로 거울이 존재한다. 거울의 배치를 통하여 이미 마그리트의 그림을 왜곡한 영상은 거울로 인하여 다시 왜곡된다. 그리고 전시회를 관람하는 이들은 어두운 공간과 나, 영상이 거울 속에 존재하는 걸 마주한다. 이것이 주는 장점은 관람자에게 작품 안에 내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주어 좀 더 친근한 마음으로 작품에 다가갈 수 있게 한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울렁증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가령 전시회의 마지막쯤 배치된 영상 공간의 경우, 큰 공간의 모든 벽면과 바닥을 영상으로 채워 넣었고, 중간에 거울 기둥을 두었다. 또한, 그 안에 다른 작은 공간에는 한 벽면에 영상을 틀고, 나머지 면을 거울로 채웠다. 전체 영상의 길이가 40분 정도인 걸 고려하면, 거울은 관람하는 이로 하여금 피로감을 유발한다. 이 영상 공간의 장점은 넓은 공간이어서 천천히 둘러보며 영상을 보는 것이 장점인데, 피로감을 유발한다면 관람하는 이에게 해가 되는 일이다. 

 이번 특별전에선,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자 마그리트의 말들을 소개한 대목이 여러 곳 존재했다. 그래서 마그리트를 모르는 이가 보더라도 괜찮은 전시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말들을 통하여 일반인도 예술 및 철학적 사유를 하는데 충분한 도움이 됐으리라 여긴다. 또한, “PLAY MAGRITTE”에서 증강현실 포토존을 체험하며 작품과 친숙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곳곳에 아쉬운 점은 존재했다. 가령 모조품의 경우 몇 대 몇의 비율로 축소했는지에 관한 정보는 없었고, 모조품과 이를 소개하는 디스플레이의 간격이 짧아 제대로 감상하기 힘들었다.      

 전시회에 관한 얘기가 아닌, 작품에 관한 얘기를 하자면, 『La trahison des images(ceci n'est pas une pipe)』은 지금도 예술 작품을 관람하는 사람에게 고민을 준다. 우리는 어떤 이미지에 대응하는 이름을 연상하는데, 그것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마그리트 전시를 보면서 우리는 사과, 달, 돌, 구름 등을 봤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그 무엇도 보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이미지에 불과할 뿐, 사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우주의 모든 물질은 이미지다.”라고 했던 말을 생각하면, 이제 사과, 달, 돌, 구름이라는 개념 또한 이미지가 된다. 우리는 한순간 이미지를 관측했을 뿐, “사태 그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에 다가간 것은 아니다. “사태 그 자체로”는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가다머가 주장하듯, 우리는 지평융합(Horizontverschmelzung)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른다. 

 푸코의 『ceci n'est pas une pipe』를 읽으면, 그가 『말과 사물』에서 벨라스케스의 「시녀들」과 이 작품이 대립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후자는 재현 주체가 명확히 존재하지만, 전자는 작품의 제목을 통하여 재현 주체가 사라진다. 그곳에 남는 것은 대체 무엇인지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이미지일 뿐이다. 푸코는 칼리그람과 결부시켜 순수 언표를 설명하는데, 순수 언표는 재현 주체의 사라짐이라는 현상까지 사라져야 나타나는 현상이다(『ceci n'est pas une pipe』, p.134). 이제 작품을 마주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나는 그냥 파이프라고 생각할래.” 혹은 “물체”이다. 

 호명하는 행위를 멈춘 우리는 작품 안의 그 무엇을, 무엇이라 부를 수 없어서 無, 혹은 空의 상태로 두어야 한다. 우린 자연스레 입이 근질근질 해지고, 답답한 기분을 마주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일상은 김춘수의 「꽃」에서 말하듯, 부름으로써 의미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부름의 멈춤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양희가 필용에게 “그냥 나무나 봐요”라고 말하는 것은, 나무는 우리를 보고 ㅋㅋㅋ하고 웃지 않기 때문이다. 부름이 멈춘 곳에는 그 무엇도 없으므로(혹은 비어있으므로), 자연스레 자신에 관하여 생각하게 된다.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 혹은 오늘의 기분은 어떠했는지 등을 말이다. 그것이 불러올 결과가 행복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일종의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너 자신을 알라”라는 명제를 마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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