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불호.
푸코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는, 현실의 유토피아였다. 개인의 헤테로토피아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고, 사회의 헤테로토피아는 사창가와 휴양지 같은 곳이다. 전시회의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은, “미술관이라는 공간은 헤테로토피아가 될 수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었다. 필자는 가능하다고 판단했는데 그 이유는, 미술관의 전시가 누군가의 마음에 정말 쏙 든다면 그곳이 유토피아이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회가 대중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GUCCI”가 기획한 전시이기 때문이다. GUCCI는 서울에 저마다 다른 성격의 독립 예술 공간들을 대림미술관에 초대했다. 그리고 이번 전시는 나 또한 호불호가 강했던 전시회였다.
1층의 세탁실에는 물고기의 꼬리로 보이는 형태가 세탁기의 입구에 걸려 있다. 작품 「이다! 이다! 이다!(IDA! IDA! IDA!)」의 설명을 보면, 이를 물고기의 꼬리가 아닌 “인어”의 꼬리라고 명확하게 지시한다. 작가는 어째서 세탁실에 인어의 세 인어의 꼬리를 세탁기의 입구에 배치했을까? 작품 설명에 의하면, 세탁실은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만나는 민주화의 환경이다. 하지만 인어는 어딘가에 서 있거나, 혹은 누워 있는 것이 아니라 세탁기의 입구에 있다. 인어에게 세탁실은 민주화의 환경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인어는 세탁실에 올 필요가 없다. 바다에 사는 생물에겐 옷이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인어가 납치됐다고 보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세탁기의 입구에 상체가 박힌 세 인어의 이름은 “이다”이다. 이다의 뜻은 여럿 있는데, 작품과 어울리는 의미는 독일에서 여자 이름으로 쓰인다는 뜻이었다. 왜냐하면, 인어는 남성 보다 여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인어 공주 동화의 문제는, 공주가 왕자를 만나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고 다리를 얻는다는 점에 있다. 인어는 인간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이고, 변형된 존재이다. 기준이 인간이므로, 인어는 기준에 다다르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해야만 한다. 즉, 인어는 인어로 이해받는(받아들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유사하므로 이해되어지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거시적 관점에서 연장한다면, 과거의 여성은 여성 그 자체로 이해받는 존재가 아니라, 남성의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변형해야 했던 존재라는 말이다. 과거(혹은 지금도) 여성의 모습도 이곳 세탁실에 세 인어의 꼬리만 보이는 것처럼, 자신을 항상 잘라냈음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사이키델릭 네이처; 나타샤와 두 개의 노란 조각」은 마주하자 마자 조잡함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먼저 영상 편집에 이용되는 소리가 굉장히 조잡하고 잡음이 많이 들려서 헤드셋을 끼고 영상을 감상하는 동안 굉장히 귀가 아팠다. 또한, 영상의 내용과 이를 편집한 기술이 2000년대 초반 플레쉬 몹으로 만든 듯한 느낌을 줬다. 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계속해서 헛웃음이 나왔는데, 영상을 다 보고 든 생각은 무의미 그 자체였다. 처음엔 “이런 작품을 통하여 전시회의 작품이 가지는 숭고미와 가치 있음을 일부러 격하시키려는 시도”라고 생각했지만, 곱씹을수록 이 작품 때문에 이 전시회에 초대받지 못한 다른 작품을 생각하니 화가 났다.
작품 자체를 보기 꺼려지게 만들고, 좀 더 격하게 말하면 이것을 ‘작품’이라 부르기 싫게 만드는 요소는 조잡함에 있다. 과거 뒤샹의 “샘”은 그가 처음으로 시도했기 때문에, 변기가 가지는 더러움을 넘어선 예술성에 대한 논의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것에 대한 논의는 그와 같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번 전시회 안에 존재하는 무수한 영상을 생각하면, 이것이 보여주는 편집과 사운드는 다른 영상들 보다 정말 부족하고, 부끄럽다고 봐야 한다. 전시회를 관람하러 온 사람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싶은가? 영상에 나오는 김첨치의 추접함? 얼굴에 분칠을 한 나타샤의 친절함? 혹은 강렬한 색감? 대왕 트레블의 재미? 그것을 잘 살리려면, 작품을 보는 사람을 고려하고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이는 그 어떤 고려도 없이, 독자에게 관람을 강요한다. 관람을 강요한다는 점은, 전시회 계단에 배치된 성 정체성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배우 부적절한 시도가 아니었을까.
네이버 평점을 보면 이번 전시회는 사람들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걸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작품들이 많았을뿐더러, 작품 설명 또한 불친절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예술 작품이 대중에게 친절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최소한의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라 개인의 유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칸딘스키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모든 예술 작품은 그 시대의 아들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