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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기자 Nov 20. 2020

엄마가 사준 양복을 버렸다

쿨하지 못한 의류 분리수거

 

집 앞 분리수거장에 있는 의류 수거함


옷장을 정리했다. 생일선물로 받은 캐시미어 코트를 걸어둘 곳이 없어서다. 나에게 할당된 옷장은 딱 한 칸뿐이었다. 새 옷 하나를 넣으려면 헌 옷 하나를 빼야 했다.


물건을 버리는 나만의 원칙이 있다. 2년 동안 한 번도 안 쓴 거면 10년이 지나도 20년이 지나도 안 쓴다는 '2년 법칙'이다.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냥 나만의 엉터리 철학이다. 계절이 8번이나 바뀌었는데 안 쓴 거면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라 여기고 버린다. 책이든 옷이든 전자 기기든 뭐든 예외는 없다. 여전히 쓸만해 보여도 쿨하게 안녕을 고한다.   


다만 가끔 쿨하지 못한 때도 있다. 물건에 추억이 담겨 있으면 주저하게 된다. 이 물건을 버리면 추억까지 함께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날도 좁디좁은 옷장에는 엄마가 입사 기념으로 사주셨던 지오지아 감색 양복 한 벌이 걸려 있었다. 당시 물가로 20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산 옷이다. 그런데 2년은 고사하고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입지 않았다. 촌스럽거나 하자가 생긴 게 아닌데도 이상하게 손이 안 갔다. 이걸 버려야 캐시미어 코트를 넣을 수 있지만, 자꾸 망설여졌다. 나는 추억 앞에서 쿨하지 못했다.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서있는데, 혼자 옷장 6칸을 쓰는 아내가 다가와 조언을 했다. 필요 없는 건 바로바로 정리해야지 계속 끼고 있으면 짐만 많아진다고 했다. 아내는 성인이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에 무언가를 설명할 때 짓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별로 와 닿지는 않았지만, 맞는 말이었다. 지오지아 감색 양복을 의류수거함에 넣기로 했다.


사실 나는 옷장 크기와는 별개로 유독 옷 정리하는 것을 어려워한다. 내가 버린 옷을 누군가가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버리기 전에 심사숙고한다. 옷은 다른 물건과 달리 원형 그대로 재활용된다. 의류 수거함에 넣어두면 봉사기관에서 가져가 어려운 이웃에게 전달한다고 들었다. 해외로 수출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내가 입던 바지나 셔츠 따위를 내 또래의 케냐 남자가 입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옷가지를 정리를 할 때면 그 가상 속의 케냐 남자가 옷장 옆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다. 남자는 무릎이 툭 튀어나온 내 면바지를 보고선 고개를 절레절레 젔고 말끔한 와이셔츠를 보면 그 셔츠만큼이나 새해얀 이를 싱긋 드러내며 웃는다. 그 남자 때문에 새로 산 옷을 고이 버린 적도 있다.    


이 소심한 기부 습관은 최근에 생겼다. 올해 초 이사 가기 전에 옷장 정리를 대대적으로 했다. 나와 아내, 아이의 헌 옷을 한데 모으니 양이 엄청났다. 신라면 박스 3 상자 분량이 나왔다. 그걸 쌓아 들고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있는 의류 수거함에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미 의류 수거함은 만원이었다. 입구까지 꽉 찬 것도 모라자 그 밑에까지 옷들이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녹색 괴물이 만취한 상태에서 토를 해놓은 것 같았다. 기분이 찜찜했다.


차고 넘쳐나는 의류수거함이 인간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 느껴졌다. 사랑의 빵 저금통에 십 원짜리 동전만 가득 찬 것보다도 서글펐다.


지난주에 의류수거 업체 사람을 만났다. 아니 우연히 일하는 걸 봤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와 그네를 타고 있는데 한 남자가 건너편 분리수거장에서 옷 보따리를 용달차에 싣고 있었다. 더 타겠다고 보채는 아이를 억지로 고서 그쪽으로 서둘러 갔다. 이 옷들이 정말로 케냐로 가는지, 못써서 버리는 옷은 얼마나 되는지, 요즘 들어 옷 양이 늘지는 않았는지 따위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사람에게 그런 한가한 질문을 하기가 미안하기도 했지만, 그의 분위기가 너무 위압적이라서 귀찮게 했다가는 한 대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저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양복이 누군가의 새로운  추억이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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