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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기자 Nov 26. 2020

스타벅스라면 양잿물도 먹겠습니다

진심 없는 환대에 관하여


지난주 동네에 있는 스타벅스에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캐리 더 메리'라는 빨간색 입간판이 보였다. 크리스마스 시즌 메뉴를 소개하는 광고였다. 그걸 보고 다음 달이 크리스마스였구나, 벌써 한 해가 끝났구나 했다.


거기 그려진 메뉴는 눈여겨보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킬 거니까. 매일 같이 스타벅스에 가면서 별의별 음료를 다 시켜 먹어 봤지만 비싸기만 할 뿐 그냥 그랬다. 그렇다고 스벅 아메리카노를 좋아한 것은 아니다. 내 컨디션이 안 좋을 때의 그것은 사약 같았다. 사약을 먹어보진 않았지만, 딱 그런 맛일 것 같다. 그럼에도 내가 아메리카노를 시킨 것은 싼 맛 때문이다. 단 돈 4,100원이면 하루 종일 거기 죽치고 있어도 아무도 내게 뭐라고 안 한다. 물론 더 싼 오늘의 커피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것은 왠지 모양 빠지는 것 같아서 잘 안 시킨다.


고민할 것도, 두리번거릴 것도 없다. 계산대로 갔다. 아메리카노 따듯한 거요. 톨 사이즈요. 먹고 갑니다. 세 마디면 끝이다. 칵테일바에나 있을 법한 높은 의자에 한쪽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네이버 검색창을 열었다 았다 하고 있었다.  


OO 고객님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아아. 직원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7 음계 중 솔 음에 해당하는 듯했다. 듣기 편했다. 끝의 다아아는 앞의 말과 달리 비음이 섞여 있었다. 길게 끄는 비음이 매장 전체에 울렸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지만 기분 나쁘게 들리지는 않았다. 커피를 집으면서 목소리의 주인을 봤다. 직원의 이름은 캐리. 검은색 명찰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캐리는 뜨거우니 조심히 들고 가세요오오라고 하며, 이번에도 요오오를 비음 처리했다. 말버릇인가. 왜 이러지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그 음성이 싫지 않았다.  


5년 전인가 일본 후쿠오카로 2박 3일간 여행을 간 적이 있다. 습도가 높고 더운 지방이란 이야기를 듣고 반팔 차림에 쪼리를 신고 갔다. 그렇게 유후인 거리를 쏘다녔는데, 발가락에 물집이 생기더니 터져서 연분홍 속살이 드러났다. 약국을 들려 노파 한 분에게 대일밴드 비슷한 걸 사서 환부에 붙였다. 그 사이 노파는 칡즙 같은 걸 소반에 담아 내오더니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나가는 나를 향해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인사를 했다. 밴드 하나 산 것 치고는 과분한 환대였다. 그때도 캐리의 비음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던 것 같다.


대게 이러한 환대는 일방적이다. 받는 사람은 받기만 할 뿐 줄 길이 없다. 큰절을 받았다고 똑같이 큰절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커피 주문을 할 때 캐리처럼 솔톤에 비음을 낼 수 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덤덤히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아서 먹는 것뿐이다.


기업의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캐리는 나를 아메리카노만 시키는 짠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물론 그는 그런 티를 절대 내지 않는다. 내서는 안 된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글로벌 기업인 스타벅스는 하워드 슐츠의 철학이 담긴 응대 매뉴얼을 각국 법인에 배포했을 것이다. 법인들은 각 지점장에게, 지점장은 직원들에게 그 내용을 철저하게 가르쳤을 것이고. 교육된 환대, 자본주의의 환대다. 환대 산업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나는 당할 수밖에 없다. 환대는 그냥 환대일 뿐이다. 내 마음은 진심 어린 환대와 진심 없는 환대를 구분하지 못했다. 나는 내일도 스타벅스에 갈 것이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먹을 것이다. 그 맛이 양잿물 같아도 크게 개의치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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