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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설 쓰는 기자 Dec 24. 2020

크리스마스에는 분리수거를


크리스마스이브날 나는 아파트 베란다에 쪼그리고 앉아 재활용 쓰레기를 분리했다. 섞인 것이 없는지 평소보다 꼼꼼하게 점검했다. 내일부터 '재활용 가능자원의 분리수거 등에 관한 지침' 개정안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개정안에 따르면 투명 페트병과 합성수지 용기를 구분해서 배출해야 한다. 쉽게 말해 삼다수 같은 생수병과 빨간색 칼라 용기인 고추장통을 한 포대자루 안에 버리면 안 된다. 개정안과는 별개로 페트병에 붙은 라벨을 말끔하게 떼어내고 납작하게 밟아서 버리는 것도 상식 중의 상식이다. 이렇게 얘기하니 내가 꼭 환경보호론자 같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환경 따윈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이 없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우리 아버지다. 


아버지는 얼마 전부터 아파트 수위 일을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험한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싶었다. 초소에 죽치고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심심하면 괜히 한 번씩 순찰을 돌고 부재중인 주민들의 택배 정도나 받아 주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수위의 업무였다. 


하지만 상상은 상상일 뿐이었다. 아버지는 쓰레기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쓰레기를 버린 사람들과의 전쟁이다. 플라스틱 용기 같은 재활용 쓰레기가 너무 많이 나와 감당이 안 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쓰레기를 그냥 놓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주도면밀해서 잡을 수도 없다. 부잣집 앞에 갓난아기를 두고 도망가는 무책임한 부모처럼 소리 소문 없이 쓰레기 더미를 두고 사라진단다. 


탐정 드라마를 방불케 하는 추격전도 펼쳐진다. 누군가 덩치가 큰 책상이나 의자, 소파 따위를 신고도 없이 무단 폐기하면 그 시간에 일한 수위가 처리 비용을 대신 내야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시시티브이를 수십 번 수백 번 돌려서라도 범인을 찾으려고 애쓰신다. 우여곡절 끝에 버린 사람 집에 찾아가면 태연한 표정으로 그거 얼마냐고 묻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버린 쓰레기가 무슨 진공관 같은 데로 슉 빨려 들어가 폐기처리장에 자동으로 쌓이는 줄 아나 보다. 아니면 그냥 내 눈 앞에 안 보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거나. 


아버지가 수위일을 시작한 이후로 모든 아파트 수위 분들이 다 내 아버지로 보인다. 엊그제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아버지는 경비실 벽면에 새로운 분리수거 법이 담긴 포스터를 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숙지하기 위해 스마트폰 카메라를 꺼내어 찍었다. 갑자기 웬 남성이 자신의 뒤에서 서 있는 걸 본 아버지는 흠짓 놀라시며 뭐 하는 거냐고 물었다. 잘 기억하려고 찍었다고 하니 아버지가 내게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고 했다. 나도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바뀐 분리수거 법이 잘 지켜지면 좋겠다. 기독교인에겐 예수님의 탄생일, 무신론자에겐 태양신의 생일, 그냥 직장인에겐 빨간 날인 크리스마스는 내겐 분리수거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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