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Harvey Milk
샌프란시스코 여행은 여러 번 했다. 그럼에도 이번 여행이 특별했던 것은 하비 밀크와 함께해서가 아니었나 싶다. 하비 밀크라는 사람을 알고 나서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니면 시내 많은 곳에 그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래서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나보다.
매번 샌프란시스코를 돌아다니면서 항상 다니던 곳을 이렇게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번 여행의 동행이 인권운동에 관심이 있고 하비 밀크 영화를 봤던 사람이라 나도 그에 대해 배우게 되었다. 역시 여행은 누구와 다니느냐에 따라, 어떤 마음으로 다니느냐에 따라 다른 경험을 안겨주는 것 같다.
하비 밀크(Harvey Milk)가 누구인가?!
하비 밀크는 인권운동가이자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이었던 사람이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동성애자 정치인이며 동성애자의 인권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주로 활동하였던 곳은 샌프란시스코 시내의 카스트로 지역. 그 지역은 아직도 퀴어 거리로 유명하다. 그가 애인과 함께 살았고 선거운동을 했던 곳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는 동성애자 차별 법안을 막고 그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다. 그 당시 환영받지 못했을 인물이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는 시청 앞에서 퇴근길에 호모포비아였던 동료 정치인에게 총을 맞아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일대기가 영화화되고 난 뒤 더욱 유명해졌으며, 캘리포니아 주에서는 하비 밀크 데이를 지정하기에 이른다.
이 곳은 아직까지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실제 극장이며, 카스트로의 랜드마크이다. 주로 독립 영화를 상영한다. 영화 티켓을 사야만 안쪽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곳인데, 운이 좋게 가드 분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쪽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극장 한쪽에 걸려있는 영화 하비 밀크의 포스터를 발견하고는 역시나 했다. 영화에서 하비 밀크 역을 맡은 배우는 숀 펜이며 하비 밀크와 비슷하게 변신하여 열연하였다.
퀴어 거리로 유명한 이 길은 분위기가 색다르다. 퀴어를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이 크게 중앙에 걸려있고 어딜 가나 무지개 색으로 화려하다. 길의 바닥에서 여러 사람들의 얼굴과 이름이 새겨진 동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는데 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자로서 힘들게 살았고 또 그들을 위해서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초의 게이 메이저리그 선수였던 글랜 버크가 보이길래 사진을 찍어 보았다. 하비 밀크도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아 찾아보다가 동판이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하비 밀크는 카스트로 거리의 시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이 곳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의 얼굴과 이름을 딴 하비스(Harvey's)라는 펍이 있을 정도이다. 이 펍도 하비 밀크가 활동을 하던 시절 'Elephant walk'이라는 이름으로 이 곳에 있었는데, 이후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고 다시 지은 후 하비 밀크를 기념하기 위해 하비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펍을 열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성소수자들의 쉼터가 돼주고 있는 역사적인 곳이다.
많은 사람들이 퀴어를 상징하는 색을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무지개 색으로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남색을 제외한 6가지 색깔만 사용한다. 처음에는 7가지 무지개 색에 핑크색까지 8가지 색을 사용하였다. 색마다 의미가 담겨있음은 물론이다. 후에 여러 가지 이유로 6가지 색으로 축소되었다.
실제로 여러 곳에서 무지개 색을 LGBT색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 가지 예로 밴쿠버의 한 디저트 가게에 갔었을 때, 그곳에서 팔고 있던 무지개 크래프트 케이크의 이름이 프라이드 케이크였던 것을 보았다. 프라이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6월에 열리는 퀴어 페스티벌의 이름이다.
카스트로 거리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보았다. 워낙에 서점을 좋아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갔는데 퀴어 관련된 흥미로운 책들이 너무 많아 몇 시간을 보내고 말았다. 물론 하비 밀크를 다룬 책도 있었다.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은 동화책이었는데, 아이들의 수준에서 쉽게, 하지만 고민해볼 만한 문제를 담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모두가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동성애에 대한 편견 없는 이미지를 가질 수 있다면 이 사회는 곧 바뀔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화책을 몇 권 사서 나오면서 한국은 언제쯤 가능할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카스트로 지역에 위치해 있는 GLBT 뮤지엄. 이런 곳에 박물관이 있다니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크지 않은 공간에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도 하비 밀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전시실 한쪽에 하비 밀크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그의 연설을 녹음한 파일도 있어 직접 들어볼 수도 있다.
이 곳은 하비 밀크의 남자 친구가 카메라 가게를 하던 곳이었다. 그 카메라 가게는 없어지고 그 자리에 인권 운동을 하는 Human Rights Campaign이 들어와 있다. 안에 들어가면 기념품을 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가격이 싸진 않았지만 수익금으로 좋은 일을 할 것 같아 몇 가지 기념품을 샀다. 또한 그 당시 하비 밀크와 그의 남자 친구가 이 건물의 2층에서 함께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건물의 2층 창문에 하비 밀크가 내다보고 있는 듯한 그림이 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은 여러 번 가본 적이 있는데, 여기에 하비 밀크가 있다는 것은 몰랐었다. 하비 밀크가 호모포비아에게 총을 맞은 것이 퇴근길 시청에서 나오다가 였다고 하여 둘러보러 갔다. 영화를 보지 않아서 영화에 나왔던 곳이 실제 이 시청인지는 잘 모르겠다. 영화를 본 일행은 너무 오래전에 봐서 가물가물하지만 영화에 나왔던 시청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은 내부에서 웨딩촬영을 할 정도로 예쁘기로 유명해 시청 내부도 들어갔는데 시청 복도 한편에 있던 하비 밀크 흉상을 발견하였다. 흉상 아래쪽에는 하비 밀크의 살아생전의 모습도 조각되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 시청 맞은편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도서관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 중에 하나이다. 워낙에 책을 좋아해서 서점이나 도서관만 보면 정신 못 차리는 경향이 있기도 하고, 샌프란시스코 도서관은 주기적으로 여러 전시도 하고 있어 재미있는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 샌프란시스코에 지내면 이 도서관은 꽤나 자주 가는 곳이 되는데 이곳에 하비 밀크가 있을 줄이야.
샌프란시스코 시청에서 나오면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위치한 도서관으로 발걸음이 향한다. 도서관을 둘러보다가 샌프란시스코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실에 들렀다. 도시의 지도들과 과거 샌프란시스코 대한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었고, 100여 년 전의 대지진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이후에 다시 재건된 도시에 대해서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자료실에 하비 밀크가 있었다. 정말이지 하비 밀크는 샌프란시스코 어느 곳에나 있었다. 다만 내가 그동안 몰랐기에 못 보고 지나쳤던 것뿐이지. 자주 오고 가던 샌프란시스코 도서관이 하비 밀크의 존재로 새롭게 느껴졌다.
샌프란시스코 동쪽에 위치한 오클랜드 시를 돌아다니다가 메모리얼 파크를 지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를 위해 많은 힘을 쏟았던 사람들을 기리는 작은 공원이었다. 그곳에는 링컨 대통령, 넬슨 만델라, 마더 테레사, 간디처럼 평화와 희생을 대변하는 유명한 사람들도 있었고, 로사 파크스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같은 인권 운동가들도 있었고, 911 테러에 희생된 소방관의 모습도 있었고,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눈에 띈 이름, '하비 밀크'. 하비 밀크도 이 공원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 가능했다. 아직 갈 길이 많이 남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많이 사라지고 그들의 대우에 대해서 신경 쓰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진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하비 밀크의 역할과 해왔던 노력들이 매우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 외에도 시내를 돌아다니며 인권운동을 하던 서점이라던가 정부 지원으로 운영하는 보호 센터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었는데, 이 역시 관심이 없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법한 것들이다. 평소에 항상 다니던 길에 위치해 오며 가며 봤던 건물인데 전혀 의미를 몰랐다. 이렇게 다른 관점으로 도시를 바라볼 수 있게 같이 여행해준 일행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HOPE WILL NEVER BE SILENT.
(희망은 결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 HARVEY MILK (하비 밀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