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biaco
모두를 태운 버스는 로마를 뒤로 하고 다른 도시를 향해 갔다. 수비아꼬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르는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듯했다. 굳이 이 곳을 찾아가는 이유는 삼촌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다고 해서였다. 패키지를 예약할 당시 고집을 부려 넣었지만 가이드님도 버스기사님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라고 했다. 아무도 가보지 않은 곳을 가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험난했다.
수비아꼬에서 우리가 가보려고 했던 곳은 베네딕토 수도원이었는데, 동굴에 은신처를 둔 것에서 시작한 곳이니만큼 찾기가 힘들었다. 수비아꼬까지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어떻게든 도착했지만, 워낙 작은 도시이다 보니 큰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이 많았고 길을 돌고 돌고 돌아서 다녀야만 했다.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겨우 맞는 길을 찾았지만 산길인 데다가 길이 좁아 버스기사님이 꽤나 힘들어하셨다.
결국 산 중턱에 내려서 트래킹 길로 걸어가기로 했지만, 수도원과 약속한 시간은 이미 지났고 가이드님은 초조한 마음에 산을 뛰어 올라가셨다. 우리도 산길로 걸어 올라갔지만 가이드님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트래킹 길은 일반 도로와 만나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나마 무리 중에 가장 나이가 적고 빠른 내가 가이드님을 따라잡기로 하고, 다른 분들에게 갈림길에서 잠시만 기다리시라고 하고는 뛰어 올라갔다. 산길을 뛰어 올라가는 것은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을 분들을 생각하면 빨리 다녀와야 할 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도원과 약속한 시간이 한참 지난 것만은 분명했다. 더운 여름날에 날씨도 좋아 땀을 줄줄 흘리며 올라가다 보니 베네딕토 수도원의 것으로 보이는 현판이 보였고 좀 더 달려가 보니 베네딕토 성인으로 보이는 조각상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뒤 쪽으로 절벽을 따라 지어진 멋있는 건물이 보였다. 한데 가이드님이 보이지 않아 수도원으로 추정되는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수도원 건물 안에서 만난 사람은 수도사로 보였는데 나를 보고는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너무 늦게 왔다며, 점심시간도 지났다며, 지금이 몇 시냐며, 다들 어디에 있냐고 말이다.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길을 너무 헤매서 그랬다면서 다들 오고 있다고 나는 가이드 따라 먼저 도착했다고 말이다.
대체 먼저 간 가이드님은 어디 가고 내가 먼저 도착한 걸까 생각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가는 중에 일행 중의 다른 분을 만났다. 그분은 가이드님을 만났다면서, 가이드님이 다른 사람들을 다 데리고 올 거라고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해주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가이드님은 나보다 먼저 그 화난 수도사를 만나셨고, 나처럼 혼나고 자초지종을 설명한 이후에 사람들을 데리러 가신 거였다. 산길을 오르다 차가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찾았고 사람들을 모두 버스에 태워 오셨다. 그 와중에 산길을 따라 올라간 나만 보이지 않으니 엄마가 걱정을 하셨고, 다른 분이 나를 뒤따라 오셨던 것이다.
화를 내셨던 그 수도사는 모두가 도착하자 일단 미사를 드리자며 예배당을 열어주고 안내를 해주었다. 나는 예배당에 앉아 있다가 땀이 너무 많이 나는 데다가 힘들어서 밖으로 나와서 수도원 계단에 앉아 쉬었다. 조금 숨을 돌릴만하니 그제야 수도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 베네딕토 수도원은 거룩한 동굴 수도원(Sacro Speco)이라고도 불린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베네딕토 성인은 유학차 로마에 갔다가 로마의 타락한 모습에 실망을 하고 수비아꼬의 천연 동굴에 은거하며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그 동굴에 세워진 수도원이 바로 이 수도원이다.
수도원은 절벽을 따라 세워져 있어 굉장히 멋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수도원에서 바라보는 광경도 놀랍도록 멋있었다. 하지만 수도원 내부는 소박하기 그지없다. 칠이 많이 벗겨진 벽화 하며 큰 장식물 없는 예배당도. 그냥 지하실 같은 느낌에 어둑어둑했다. 동굴이라서 그런 듯했다.
미사가 끝나고 나오자 처음 만났던 화나 보이던 수도사는 친절한 미소로 점심이 준비되어 있다고 전했다. 역시나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까는 우리가 너무 늦어서 화를 좀 냈나 보다 싶었다. 준비되었다는 수도원 식사를 점심으로 먹기 위해 빠르게 수도원을 둘러보고 나왔다. 이미 너무 늦은 터라 점심 예약도 늦음은 물론이었다. 수도원을 방문한 것도 처음인데 수도원식 식사라니, 매우 기대가 되었다. 혹시나 고기가 없을까 걱정도 조금 했다. 식사를 할 곳은 수도원에서 좀 떨어진 건물이어서 조금 걸어야 했다.
식당의 내부는 소박했고 앉자마자 와인부터 제공되었다. 수도원에서 직접 만든 와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라벨 없는 빈 병에 와인을 가득 채워서 갖다 주었다. 와인 병이 비면 빈 병을 가지고 가 또다시 와인을 가득 채워서 갖다 주었다.
식전 빵이 제공되었고 애피타이저로 살라미처럼 보이는 각종 햄과 치즈가 나왔다. 짭짤한 치즈와 햄이 와인 안주로는 아주 딱이었다. 그리고 토마토소스에 버무린 소시지가 나왔고 이어서 파스타가 나왔다. 서빙을 해주시는 분은 영어를 잘 못해서 원활한 대화는 힘들었지만 어찌나 유쾌하신 분인지 음식 사진이라도 찍을까 싶어 카메라를 꺼내면 스스로 재밌는 포즈를 취해 주셨다. (난 음식만 찍으려고 한 건데;;) 와인병이 계속 비고 몇 번이나 다시 가져다주시기에 미안해했더니, 와인 병에 구멍이 났나 하시며 병 아래쪽을 확인해보고 가셨다. 정말 재밌으신 분이었다.
파스타를 먹고 나자 배가 너무 불러 더 이상 뭘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메인 요리가 하나 더 나오는 것이 아닌가. 원래 정통 이탈리아식은 메인 요리가 두 개라고 한다. 하나는 고기 요리고 하나는 파스타류라나. 어쨌든 두 번째 메인 요리는 돼지고기로 보이는 스테이크에 감자가 함께 등장했다. 안 먹을 수 없어 배가 부른 와중에 입에 마구 넣었다. 좀 짜기는 했지만 다 맛있는 식사였다. 디저트까지 등장해서 다 먹고 났더니 배가 터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대부분의 것들을 수도원에서 자급자족하는 것으로 보였다. 와인과 디저트는 수도원에서 직접 만든 것이라 했고, 식당 옆 쪽에서 쿠키, 잼, 술 등을 팔고 있었다. 여러 가지 과일 잼을 사고 싶었는데, 무게가 꽤나 나가서 포기했다. 식당으로 이동하던 중에 가이드님 몰래 수도원 성물방에서 사탕과 천사상을 산 걸로 만족해야지 했다. 그런데 무리 중에 한 분이 우리 팀 모두를 위해 쿠키를 왕창 사 가지고 나오셔서 하나씩 나누어 주셨다. 아, 그리고 저녁에 삼촌이랑 마실까 하고 이탈리아 술인 그라파도 한 병 샀다. 몰래 하느라 급하게 했지만 만족스러운 쇼핑이었다.
수도원을 가는 길은 고생길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다들 수도원에 가보고 수도원식 식사를 한 것에 만족해했다. 고생한 것도 이렇게 추억이 돼가는 것 같았다. 가이드님은 돌아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다들 고생하셨다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셨고, 다시는 안 가련다고 장난스레 투정도 부리셨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곳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