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sisi
다음 목적지는 아씨시였다. 아씨시도 작은 도시여서 많은 관광객이 오는 곳은 아닌데, 이 도시에 오는 관광객들은 다들 프란치스코를 보기 위해서 온다고 한다. 이 도시 전체를 프란치스코가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프란치스코 성인은 아씨시에서 태어났으며 이 성당에 묻혔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모자람 없이 자랐지만 전쟁에 참여했다가 그 참혹함을 경험하고는 수도자의 삶을 살게 된다. 전재산을 교회와 불우 이웃을 돕는데 쓰고는 물욕을 버리고 최소한의 것만 입고 먹으며 생활했다고 한다.
성당 내부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생애가 벽에 그려져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성 프란치스코'라는 작품이었는데, 새들에게 전도를 했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라 한다. 그는 동물의 수호성인이기도 하여, 회화 작품에 동물과 함께 있는 성인이 있다면 프란치스코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성당을 다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거적을 입은 한 노인 분이 이탈리아어로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있었는데, 아마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따르는 사람인 듯했다. 이탈리아어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분의 행색이 물욕을 버린 프란치스코와 비슷해 보였다.
"Dulce bellum inexpertis." 가이드님은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설명하면서 이탈리아어 한 구절을 알려주셨다. "전쟁은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달콤한 것이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다 보면 이 산타 키아라 성당이 나온다. 골목길 양쪽으로 작은 상점들이 있어 구경하면서 걸어가기 좋다. 프란치스코 대성당에서 산타 키아라 성당까지 걸어가면서 사람들 몰래몰래 젤라토도 사 먹고 쇼핑도 했다. 다른 사람들도 가이드님의 방식에 지쳤는지 그룹에서 몰래 사라졌다가 잠시 뒤에 나타나 모른 척 합류하기도 했다.
아씨시의 성인은 프란치스코라 하고, 아씨시의 성녀는 클라라라 한다. 클라라는 귀족의 딸로 태어났지만 신앙심이 깊어 기도 생활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가출을 해 프란치스코의 삶을 좇는다. 가출한 클라라는 가족을 피해 몇몇 수녀원을 전전하다가 교회 공동체를 세우게 되고, 훗날 이 공동체는 성 클라라 수도회라고 불리게 된다. 프란치스코의 삶을 좇았던 만큼 엄격하고 검소한 삶을 추구했고, 이 수녀들은 가난한 자매들이라 불리기도 했다. 성녀 클라라는 또 다른 프란치스코라 불릴 정도로 프란치스코의 생활 방식을 본받아 생활했고, 프란치스코가 병들어 죽기까지 그를 돌보았다.
가이드님은 클라라 대성당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자꾸 사라져서 뭔가를 사 온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드디어 자유시간을 허락하셨다. 그리하여 아씨시의 골목길을 탐험할 시간이 생겼다. 나는 이탈리아의 골목길들을 정말 좋아한다. 울퉁불퉁한 돌길을 걷는 것도, 작은 가게를 구경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는 것도 다 내가 좋아하는 여행이다.
돌아다니면서 저녁에 숙소에서 먹을 와인과 선물할 묵주와 십자가를 샀다. 성 프란치스코의 도시인만큼 프란치스코 십자가가 많았다. 원래의 십자가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열 십자(十) 모양을 띄는데 프란치스코의 십자가는 티 자(T) 모양이다. 이것을 타우 십자가라고 부른다.
와인 샵에서는 무엇을 살까 고민하다가 이 지역이 토스카나 지역인 것을 생각해 내고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를 추천해 달라고 했다. 한 번도 먹어본 적은 없었지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웬걸 가격이 생각보다 비쌌다. 제일 싼 것이 얼마냐고 물어보았더니 3~40유로 정도 한다고 해서, 50유로 언더로 추천 부탁해 한 병 샀다.
저녁은 호텔에서 뷔페를 먹었다. 이것저것 많아서 갖다 먹고, 와인도 한 병 시켜서 마셨다. 엄마는 슬슬 짜기만 한 이탈리아 음식이 질리신다며 샐러드만 가져다 드셨다. 그게 제일 짜지 않다면서. 하지만 다른 분들처럼 한식을 찾지는 않으셨다. 이미 많은 분들은 한국에서 가져온 컵라면과 통조림 반찬으로 끼니를 때우곤 하셨다. 엄마는 여행이니 만큼 이탈리아 식사를 먹어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려고 일부러 한국음식들을 챙겨 오지 않으셨단다. 챙겨 오면 더 생각날 테니.
우리 옆 테이블에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앉아 같은 뷔페를 먹고 있었는데, 그들은 수도사들이거나 사제를 준비하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이탈리아어를 하기에 물어볼 수는 없었지만 오가며 눈으로 인사를 건네었다.
저녁을 먹은 후, 삼촌이 호텔 바에서 한잔하자고 나를 불렀다. 예쓰 하고 간 호텔 바에는 수비아꼬를 다녀오면서 부쩍 친해진 가이드님과 삼촌이 이미 와인을 한 병 따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명이 마시다 보니 와인 한 병은 금방 동이 났다. 바에 부탁해서 와인 리스트를 가져다 달라고 했고, 그 와인 리스트에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가 있어 한 병 달라고 했다. 가져다준 와인은 이 바에서 제일 비싼 와인이었지만, 대도시가 아니어서 그런지 호텔 바 치고는 가격도 괜찮았다. (한국 대형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쌌다.) 수비아꼬에서 고생한 이야기, 아씨시의 멋진 풍경 그리고 그 외의 여행 이야기들을 하면서 또 한 병을 비웠다. 와인 리스트에서 두 번째로 비싼 와인을 골랐다. 바롤로였는데, 가이드님이 내 와인 취향을 듣더니 좋아할 것 같다며 추천해 주셨다. 바롤로는 바디감이 좀 더 무거운 듯했다. 이탈리아 와인은 굉장히 맛있었다.
셋이서 세 병을 마셔서 좀 취했던 탓일까, 마지막 병은 사진이 없다. 아마 마시느라 잊어먹었나 보다. 취해서 인지 고마움에서 인지 호기롭게 내가 내겠다고 하고 내 방 번호를 적어두고 바를 나왔다. 그런데 그다음 날 체크아웃하면서 계산하러 갔더니, 나중에 마신 두 병 즉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와 바롤로만 찍혀있었다. 첫 번째 병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리가 비싼 와인을 두 병 먹어서 싼 건 하나 빼준 건가 싶기도 했는데,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전 날 바에서 나온 영수증을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한 병은 그냥 공짜로 먹은 셈이 돼버렸다. 덕분에 기분 좋게 계산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