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renze
피렌체, 영어로는 플로렌스, 아름답기로 유명한 도시 중에 하나이지만 나의 기억 속에는 미술관 밖에 볼 것이 없는 도시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남들은 다 좋다던 그 도시가 왜 나에게만 감동을 주지 못했는지 한 번 더 가보고 싶었다.
피렌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한 광장이다. 이 곳은 시내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높은 곳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기대를 많이 했다. 도착했을 때 날씨가 좋지 않아 구름 낀 피렌체를 바라봐야 했지만 그 또한 멋이 있었다.
이 곳에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 작품인 다비드상의 모조품이 있는데, 그냥 지나치듯 보아도 가짜인 듯 생겼다. 이름이 미켈란젤로 광장이라고 붙이어진 것은 이 광장이 미켈란젤로 탄생 400주년을 기념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피렌체 시내로 들어가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산타 크로체 성당이었다. 산타 크로체 성당은 여러 유명한 인물이 묻힌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미켈란젤로와 피사에서 스치듯 만났던 갈릴레오도 이곳에 잠들었다. 성당이 두오모처럼 크고 화려한 것은 아니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성당 앞 쪽으로는 작은 광장도 있어 길거리 잡상인이나 작은 상점, 그리고 삼삼오오 모여있는 사람들을 구경하기에 좋다.
우리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피렌체 가이드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로마에서도 로마 가이드님이 따로 있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각 도시별로 도시에 속한 가이드가 있어 해당 도시에서 단체 관광객은 그 도시의 가이드를 고용해야 한다는 룰이 있다고 한다. 우리를 인솔하는 가이드님은 독일에서 오신 분이기에 조건이 맞지 않았고, 그래서 알고 지내던 현지 가이드분에게 부탁을 한 듯했다. 피렌체 가이드님은 5개 국어를 할 줄 아셨지만, 한국어는 하지 못하셨고, 결국 우리 가이드님이 설명을 하셨다. 우리 가이드님은 피렌체 가이드님이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서 뻘쭘해하실까 봐 나에게 특명을 내리셨다. 피렌체 가이드님이랑 좀 놀아달라고 하신 것. 그 무리에서 내가 가장 여행을 많이 다니기에 외국인에게 낯을 가리지도 않고, 영어도 그럭저럭 하기에 그런 부탁을 하신 것 같다.
덕분에 피렌체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면서 그 가이드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놀았다. 외국인을 만나면 항상 받는 질문도 받았다. '북한과 사이는 어떤지, 전쟁이 날 것 같은지' 따위의. 하지만 그분의 영어 실력에 비하면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다고 생각된다.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 옆에 있어 길을 걷다 보면 꼭 지나게 되는 광장이다. 광장 근처의 건물들은 르네상스 시절에 지어진 것이 많아 예전 피렌체 공화국 시절의 느낌이 물씬 난다.
베키오 궁전(Palazzo Vecchio)은 지금도 피렌체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입구 앞에는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조각상인 다비드 상이 서 있어 많은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이 다비드 상은 복제품이며, 진짜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예전에 공격의 대상이 되어 파손이 된 적이 있기에 광장에는 복제품을 두었다고 한다. 다비드 상 옆에 또 다른 조각상이 서 있는데, 이는 헤라클레스이며 미켈란젤로가 아닌 다른 르네상스 시대 미술가의 작품이다.
란치의 화랑(Loggi de Lanzi)은 베키오 궁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에 있는 많은 조각상들이 전시된 곳이다. 대부분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장면이나 영웅을 묘사하고 있어 신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조각상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아르노 강에 있는 중세시대에 지어진 다리이다. 다리 위에 이런저런 가게들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예전에 이 가게들은 푸줏간들이 많았다고 하나, 지금은 보석가게가 많아 보였다. 강을 바라보는 풍경이 멋있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강은 매우 탁했다. 피렌체는 가죽공예로 매우 유명한데 옛날에는 이 강에서 가죽을 씻어댔다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리하지 않겠지만 어쨌든 깨끗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다리 위에는 다리 위에서 사진을 남기고 싶어 하는 수많은 관광객과 쇼핑을 하는 수많은 관광객과 그 관광객을 노리는 무리들이 있다. (돈을 뜯길 요량이 아니라면 피해 다니자.) 보석가게와 명품샵들이 자리 잡고 있어 나의 흥미에 맞지 않는 가게들이었다. 심지어 가게 이름도 롤렉스 말고는 다 모르는 이름들이었다. 하지만 다들 쇼핑을 하고 싶어 눈이 반짝거리더라. 나는 엄마와 다리에 기대 사진이나 찍고 있었다.
피렌체 두오모 성당이 있었던 자리에는 원래 다른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성당이 너무나 오래되어 건물에 문제가 생겼고 피렌체의 인구가 급격히 늘면서 새로운 성당이 필요해졌다고. 급성장하고 있었던 피렌체도 다른 도시의 두오모 성당 같은 규모의 성당을 계획하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산타 크로체 성당의 건축가가 설계를 시작하였으나 그가 사망한 이후 성당의 공사는 미루어졌다. 흑사병이 일어난 시기에도 공사가 미루어져 결국 이 성당의 건축은 100년이 넘게 걸렸다고 한다. 그 이후 이 성당은 피렌체의 중심에서 많은 역사적 사건을 지켜보며 이 자리를 지켰다.
성당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천국의 문이다.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쪽 문인데 금박이 입혀져고, 미켈란젤로가 이 문을 찬양한 이후로 천국의 문이라 불린다. 각각의 부조는 구약성서의 내용을 묘사하고 있다. 첫 번째 부조는 당연히 아담과 이브이고, 다른 부조들도 구약성서의 내용을 조금만 안다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유명한 카인과 아벨, 노아, 아브라함, 이삭과 야곱, 모세, 다윗과 골리앗 등등이 등장한다.
이 성당은 돔과 종탑이 있어 둘 다 꼭대기에 올라갈 수 있다. 자유시간에 둘 다 올라가기에는 시간이 충분치 않을 것 같아 어느 곳으로 갈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가이드님이 돔을 추천하시더라. 그래서 돔으로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었으나 티켓을 사러 간 곳에서 돔은 이미 정해진 인원이 다 차 버렸다며 예약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돔과 탑 모두 안전을 위해 하루에 정해진 인원만이 올라갈 수 있었고, 내부 입장 인원 제한도 있어 올라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올라간 사람들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으니 종탑 티켓을 사서 종탑으로 갔다. 종탑 앞에도 사람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종탑이 돔보다 약간 높아 나처럼 높은 곳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종탑이 돔 보다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종탑에 올라가면 돔이 보이고 돔에 올라가면 종탑이 보이니 서로 다른 매력도 있을 것 같다. 다음번에 또 피렌체를 가게 되면 돔에 올라가 보고 싶다.
이번에는 일행 중 다른 한 분이 나와 종탑에 같이 가겠다고 했기에 둘이서 같이 열심히 뛰어 올라갔다. 이 자유시간에 다른 분들은 가이드님을 따라 시내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가죽 공장에 가셨다. 가죽 공장에 가는 것은 계획에 없었던 일정이지만 모두가 피렌체에서 유명한 가죽 제품을 사고 싶어 했기에 가이드님이 좋은 퀄리티의 제품을 만드는 곳으로 데려다주신다고 한 것이다. 나는 가죽을 선호하는 편도 아니고 작은 기념품이나 사려고 했기에 가죽 공장에 가는 것보다는 종탑을 선택했다. 자유시간 이후 베키오 궁전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종탑에서 내려올 때 사람들이 밀려있어 생각보다 오래 걸려 조금 늦고 말았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피렌체에서 쫓겨났다고 한다. 생가는 지금 단테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생가가 있는 골목 바닥에 단테의 얼굴이 새겨진 부분이 있는데, 잘 보이지 않아서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물을 뿌리면 단테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집 앞에 단테의 신곡을 낭송하는 유명한 사람이 있다고 들었는데, 우리가 이곳을 지나던 때는 그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하는 언어였을 테지만 조금 아쉬웠다.
우피치 미술관은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가이드님은 주요 작품들을 설명해 주시고는 1시간 반 이후에 베키오 궁전 앞에서 보자고 하셨다. 하지만 이 미술관,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도 4시간은 넘게 있었던 곳이었다. 1시간 반이라니 택도 없다. 지난번에 왔었던 기억으로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 가장 감동적이었기에, 그 그림을 잠깐 보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 전시관 쪽으로 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미술관에는 유명한 미술가의 작품이 너무 많아서 다 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였다. 보티첼리,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등이 있는데, 그중에 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제일 좋아하기에 그쪽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우피치 미술관은 너무 크고 방대하여 전시장에서 길을 잃기도 쉽다. 보티첼리의 그림이 있는 방을 스치듯 지나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 길을 잃어 헤매고 있는 일행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나에게 길을 물어보았지만, 나도 어디가 어딘지 헷갈려서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나기로 한 시간에 맞춰 베키오 궁전으로 갔는데, 가이드님과 미술관에 지친 몇 분만 만날 수 있었다. 왜 다들 안 오시는지 물어보았는데, 미술관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30분을 더 주기로 했다며, 연락받지 못했냐고 하셨다. 미술관을 돌아다니면서 일행들을 몇 명 만났지만 그 이야기는 듣지 못했기에 조금 아쉬웠다. 나도 미술관에 좀 더 있고 싶었는데 말이다.
이미 나와버렸으니 엄마와 이모와 함께 골목길을 구경하기로 했다. 시뇨리아 광장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가죽 제품을 파는 작은 시장을 발견했다. 내가 종탑에 올라간 사이에 엄마와 이모는 가이드님을 따라 가죽 공장에 갔는데 마음에 드는 것을 찾지 못해 아무것도 사지 못하셨단다. 이 시장은 옛날 남대문 시장 같은 스타일의 작은 동네 시장이었지만 여러 가지 가죽 제품이 있었다. 이모는 이런 시장에서는 가격을 흥정하는 재미가 있다며, 맘에 드는 것을 고르면 바로 돈을 내지 말고 자기를 부르라고 하셨다. 돌아다니다가 안경을 담는 안경집이 색이 맘에 드는 것이 있어 선글라스를 담는 용도로 살까 하고 이모를 불렀는데, 이모는 내가 고른 것을 보시더니 주먹으로 내 옆구리를 마구 찌르더니 '야 이 속없는 것아, 이건 비닐이잖냐, 가죽을 고르라니까.'라고 하셨다. 하지만 내 눈으로는 뭐가 비닐이고 레자고 진짜 가죽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 건 어떻게 아는 거지... 결국 나는 쇼핑을 포기했다. 하지만 엄마와 이모는 선물할만한 작은 크로스 백을 몇 개 사 오셨다. 역시 쇼핑도 아는 사람이 잘하는 것 같다. 난 아마 안 될 거야...
오늘의 점심은 잘 구워진 빵과 토마토 파스타였다. 나는 여전히 잘 먹었지만, 다른 분들은 슬슬 한계에 다다른 듯 보였다. 빵 말고 밥이 먹고 싶다는 한숨 섞인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나는 매번 다른 파스타를 맛보는 것도 좋았고 매번 다른 와인을 맛보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옆에서 밥이 먹고 싶다 하는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한국의 매운 음식이 생각났다. 라면이나 떡볶이 따위의...
끼안띠 와인을 음식과 같이 먹었는데, 끼안띠는 이탈리아에서 많이 마시는 레드 와인이라고 한다. 파스타도 끼안띠도 이탈리에서 많이 먹고 마시는 것들이니 만큼 잘 어울렸다.
저녁에 가이드님은 피렌체 관광이 다 끝난 후 모두를 중국 식당을 안내했다. 피렌체에는 한식당이 없다고 미안해하시며 밥과 국이 있으니 많이 드시라고 덧붙였다. 중국식 볶음 요리 여러 가지와 수프가 나왔는데 다들 오래간만에 먹는 익숙한 음식에 밥과 국으로 보이는 수프를 계속 드셨다. 한쪽에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캔 반찬과 함께 먹고 싶다며 남은 밥을 포장해 가셨다. 얼마나 정신없이 먹었는지 사진 한 장도 찍지 못했다.
예외 없이 밤에 호텔로 돌아와 한 방에 모여 와인을 마셨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많이 먹는다는 끼안띠, 그리고 반피 와인 중에 최고라는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그리고 피사에서 맛 들였던 아마로네. 이 날 마신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여행 이후에 꽤 많이 보았다. 한국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물론 가격은 같지 않지만.
끼안띠는 무난하고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는 색만 봐도 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로네는 피사에서 먹었던 것이 더 무거워서 맛있었던 것 같은데, 이 아마로네도 굉장히 좋았다. 이탈리아는 정말 와인 천국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