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힌즈에서 보내는 편지

a letter from Bohinj

by 주유가

도브리단! 오늘은 날씨가 좋아서 호수를 다녀오기로 했어. 우리가 가려고 마음먹었던 호수는 블레드 호수와 보힌즈 호수 두 개였어. 보힌즈 호수가 좀 더 먼 곳이라, 보힌즈 호수를 갔다가 블레드 호수를 가기로 했지. 슬로베니아에는 호수가 많은데, 알프스와 닿아있어 아주 멋있는 곳이 많더라고.


보힌즈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날씨가 굉장히 맑았어. 버스를 타고 가다 호수의 동쪽 끝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내린 우리는 서쪽 끝에 있는 마을인 우칸츠까지 호수를 따라서 걸어가 보기로 했어. 버스에서 내려서 보니 근처에 인포센터가 있어 들어가 보았는데 그곳에서 또 여러 가지 산책길과 자전거 타기 좋은 코스를 소개해주더라고. 그중에 하나를 고른 거지. 우리는 호숫가를 걸으면서 사진도 찍고 이야기도 하고 재밌게 놀았어. 물은 굉장히 맑았고, 산 위쪽으로 눈이 쌓여 있어 아주 멋진 풍경을 만들어 내었어. 투명할 물에 비친 봄이 오고 있는 듯한 산의 모습은 감탄에 감탄을 불러일으켰지.


반 정도 걸었을 때였나, 내가 아주 큰 나무에 걸려있는 긴 줄을 발견했어. 감이 왔지. 이건 타잔 놀이를 해야 할 각이다! 겨울이라 아무도 없었지만, 여름에는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놀 것 같더라고. 사진만 찍으려고 가까이 갔다가 한 번 매달려 보고 싶더라. 그래서 줄을 최대한 뒤쪽으로 잡아당겨서 호수 위로 붕 날아보았어. 눈앞으로 호수가 훅 다가오는 바람에 빠질까 겁이 났지만 허공에 붕 떴다가 제자리로 돌아오니 기분이 너무 좋았어. 내가 제대로 착지하는 걸 본 막내는 동영상을 찍고 싶다며 한 번 더 뛰라고 했고, 한 번 성공한 나는 기분에 취해 한 번 더 타잔 흉내를 냈어. 나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둘째를 보면서, 너도 한 번 뛰라고 했더니, 겁이 나면서도 내가 성공적으로 해낸걸 보니 용기가 났는지 막내도 뛰면 자기도 하겠다고 하더라. 막내도 줄에 매달린 나무를 붙잡고 가볍게 성공했어. 그렇게 둘째의 차례가 돌아왔지. 그런데 둘째는 큰 마음을 먹고 뛴 지 1초도 되지 않아서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어. 그렇게 차디찬 호수의 물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ㅋㅋ 지금이야 생각하면 웃긴데, 그 순간에는 얼마나 놀랬던지 소리 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나랑 막내는 동영상을 찍고 있었는데 둘 다 놀래서 카메라도 놓치고. 우리가 소리 지른 것까지 고스란히 녹화되었어. 나중에 이 영상을 보니까 어찌나 웃기는지 나중에 기분 안 좋을 때마다 찾아봐야겠다 싶어.ㅋㅋ


아무래도 둘째는 팔힘이 우리보다 약했나 봐. 아무튼 추워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둘째를 세워두고 옷을 말리기 시작했어. 나랑 막내랑 둘째의 옷을 비틀어 짜는데 겨울옷이라 그런지 두꺼워서 잘 비틀어지지도 않고 짜도 짜도 물이 계속 나오더라고. 다행히 코트를 벗어두고 뛰어서 핸드폰이랑 가방은 살았지 뭐야. 일단 내가 외투로 입고 있던 후드와 뛰기 전에 벗어둔 코트를 대충 입으라고 주고 나머지 옷과 양말을 열심히 털고 짜서 말렸지. 내가 어쩌다 그 나무를 발견해서 이 지경에 이른 걸까 싶더라. 둘째는 워낙에 감기에 잘 걸리는 편이라 추운 날씨에 감기에 걸릴까 그게 제일 큰 걱정이었어. 감기 걸리면 이제 시작한 여행을 제대로 즐기지도 못할 것 아니겠냐고. 뭐, 다행히도 일단은 괜찮아 보이지만.


그렇게 젖은 옷을 등에 둘러메고 말리면서 한참을 더 걸어갔어. 그러다 우칸츠에 거의 다 와 갈 때쯤 케이블카를 발견했다. 아까 인포센터에서도 알려준 곳이지만 가격이 비싸서 갈까 말까 망설였거든. 이 케이블카는 스키장 케이블카인데 전망을 보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한 번만 왕복으로 탈 수 있는 티켓도 팔고 있었어. 우리는 가격 때문에 고민하다가 한 번 올라가 보기로 했어. 티켓을 사고 케이블카에 올라탔지. 케이블카는 빠르고 높게 가파른 산을 따라 올라갔어. 호수가 점점 멀어지면서 한눈에 볼 수 있을 만큼 작아지는데, 그 풍경이 좋더라. 케이블카를 타기 전에는 비싸네, 케이블카가 산에 얼마나 안 좋은데, 동물들이 불쌍해, 등등의 말을 했지만 역시 자본의 맛을 보고 나니 욕만 할 수는 없더라고. 자본의 맛 달콤해, 젠장.ㅠㅠ


케이블카에서 내려서 밖으로 나오니 눈으로 뒤덮인 봉우리 위였어. 슬로베니아에서 알프스 산 위에 오르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에 감격스러웠지. 이렇게 좋은 스키장이 있는 줄 알았더라면 스키를 타는 걸 일정에 넣어볼 걸 생각도 들더라. 다음번에 여기서 스키 한 번 타러 와야겠어. 밖에서 눈을 즐기고 싶었지만 산 위는 너무 추웠어. 그래서 로지로 들어가 점심을 먹기로 했지. 점심으로 햄버거와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둘 다 양도 굉장히 많고 맛있더라. 보힌즈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밥을 먹었어. 오랫동안 걸었던 탓인지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만.


밥을 먹고 나와 산을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타려고 하는데 너무 아쉽더라. 조금 더 있고 싶었지만, 해가 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스키 장비를 들고 케이블카를 타려고 하고 있어서 줄이 더 길어지기 전에 가기로 했어.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더니 블레드 가는 버스가 올 시간이 간당간당하더라고. 열심히 뛰었는데, 1분 먼저 도착한 버스가 그냥 떠나버리는 것을 코너에서 보고야 말았지 뭐야. 우리는 늦지 않았는데, 버스가 정류장에 사람이 없는 걸 보고 서지도 않고 가버린 거야. 버스가 한 시간에 한대뿐인 동네라서 허탈한 마음에 욕을 해댔지. 블레드 호수를 못 볼까 걱정이 되어서 마음이 조급해졌기도 하고.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한 시간 정도의 여유시간도 있겠다 버스 한 정거장 거리인 우칸츠를 보러 가기로 했어.


십분 정도 차도를 따라 걸어 만난 우칸츠는 정말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어. 여기 누가 사는 건지 의심이 되더라니까. 아무것도 없고 아무도 없었어. 버려진 마을 같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물론 비수기이고 겨울이라서 사람들의 왕래가 없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이렇게 아무것도 없을 줄이야. 하지만 산에 둘러싸인 곳인 데다가 호수가 시작하는 곳이라서 너무 예쁘더라. 아무도 없고 고요하다는 게 좀 더 신비감을 주더라고. 숨겨진 곳을 찾아낸 느낌이랄까.


조용한 시골마을에서 사진 찍고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놀다 보니까 1시간은 금방 가더라. 시간 맞춰서 아까 버스를 놓친 정류장에 가서 서있었는데, 이번엔 이 버스가 엄청 늦은 거야. 속이 부글부글 하더라고. 아까는 일찍 도착하고선 기다려주지도 않고 가버리고, 이번엔 늦고 말이야. 후... 블레드 호수에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못 보면 뭐 어쩌겠어, 나중에 또 오면 되는데, 하는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탔다. 블레드는 좀 더 유명한 호수이니만큼 더 멋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면서.


2019. 03. in Bohin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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