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다 in Lyon
인생에서 처음으로 맞는 유럽에서의 겨울을 보내고 있다.
나는 추위를 굉장히 싫어한다.
그리고 유럽의 겨울은 해가 없이 우중충한 날씨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기 딱 좋다고 들어왔다. (겪어보니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아무 로망 없이 연말을 맞이했다.
당연하게도 크리스마스도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엔 가끔 성당을 갔고, 안 갈 때는 친구들과 놀긴 했지만
큰 축제로 느낀 적이 없어서인지 프랑스라고 뭐 다를까? 싶었다.
11월이 되니 학원 앞 광장에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생겼다.
금세 북적북적해졌다. 방쇼와 온 나라의 음식들을 팔고 캐럴이 나왔다.
이때부터 심상치 않더라.
그리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나는 동생과 그레그(이제는 제부), 그의 가족들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야 했기 때문에.
가족들 선물을 한꺼번에 사야 한다니!라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을 줘도 되고,
어른들에게는 같이 돈을 모아서 조금 좋은 선물을 사드리고,
우리들끼리는 적당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선물을 고르면 되었다.
그래도 블랙프라이데이는 Merci.
재밌었던 건 서프라이즈라 서로 힌트도 안 주고 몰래 준비한 점!
이렇게 선물을 준비하다 보니 내가 최근에 이렇게 누군가를 위해 마음에 딱 맞는 선물을 사려고 고민한 적이 있던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받는 것보다 내가 준 선물을 받고 좋아할까?
안 좋아하면 어쩌지, 이건 어떨까..라고 고민하는 시간이 무려 한 달.
막판에는 아 모르겠다!!!! 아무거나 살래!! 하다가
아니야.. 좋아할 만한 거 해줘야지.. 하며 묘하게 진이 빠지면서도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에는 동생과 한국음식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레그네 가족은 해마다 돌아가면서 음식 준비를 하는데 하필 올해 내 동생 부부의 차례였던 것.
우리는 보쌈과 무쌈말이를 준비했다.
애피타이저로 푸아그라, 연어 요리를 먹고,
굴이 한창이라 엄청 큰 그릇에 그득그득한 굴과 새우를 먹었다.
이때 빠질 수 없는 것은 당연히 와인!
L’ombre라는 화이트 와인을 마리아쥬 해서 마셨다.
나는 화이트를 별로 즐겨 찾지는 않는데 이건 왜 이렇게 맛있던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정말 맛있는지 모를 정도로 쑥쑥 마셨다.
그리고 메인인 보쌈과 함께 마신 것은 1993 CHATEAU MONBOUSQUET ST.EMILION을 마셨는데
마시자마자 입에서 엄청 유창한 프랑스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맛이었다.
꾸둑꾸둑한 맛과 향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맴 돈다.
표현력이 부족하여 이 맛을 나타낼 수 없는 게 아쉽다.
그레그 아버지가 마지막 잔을 권했었는데 나는 이미 l’ombre로 충분히 취해서 더 이상 마실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먹고 마시며 크리스마스를 즐겼고,
드디어 한 달간 준비해온 선물 타임을 한 명씩 가지게 되었다.
순서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는 조카들 먼저.
좋은 선물도 많이 받았지만 (해리포터 지팡이랑 교복 세트 같은) 초콜릿만 받아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내가 준비한 선물의 양만큼 나도 받았다.
선물을 풀어보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하나씩 뜯을때마다 기대감이 커지고 초콜릿을 받은 조카들만큼이나 너무 신이 났다.
이런 날이 12월 마지막에 있다면 그 춥고 지루한 겨울도 즐거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난생처음으로 했다.
그냥 특별하지 않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곳 프랑스의 크리스마스는 다르긴 달랐다.
가족들이 뭘 좋아할지 한 달 넘게 생각해야 하는 시간도 가져야만 했고,
크리스마스 저녁에 뭘 먹어야 할지, 트리는 어떻게 꾸밀지, 테이블 데코는 어떻게 할지 작은 고민부터 큰 고민까지 그 하루를 위해 모두가 열심히 기대감을 가지고 준비했다.
이런 고민이라면 매일 해도 즐겁겠다. 일 년 내내 크리스마스였으면 좋겠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참 많이 생각났다.
다 같이 수다 떨고 맛있는 거 먹으면 얼마나 즐거울까!
겨울에 대한 아무 로망도 없었던 내가
또다시 겨울이 되어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린다.
산타를 만나지 않더라도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과 얼마나 신나게 웃게 될지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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