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해 - 노동의 새벽(1984)
문학의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문자가 발명되고 이를 기록할 수단이 생기기 훨씬 이전, 인류의 삶은 늘 문학과 함께해 왔다. 인간의 감정과 사상이 언어로 투영된 것을 문학이라 하기에, 문학의 역사는 곧 언어 사용의 역사라 할 것이다.
그렇기에 문학은 문인 집단에 의해서만 창작되는 특정 집단의 전유물이 아니다. 만인에 의해 창작되고, 만인에 의해 읽혀지는 만인의 예술이 문학이다.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글을 쓴다는 것은 글을 읽고 쓸 수만 있다면 모두에게 열려 있기에 문학은 우리 사회의 상층부부터 하층부까지 거의 모든 계급의 모습을 투영해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 불합리한 사회를 고발하는 각종 문학 작품은 공안 당국의 눈을 피해 지하에서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왔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저작들 또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 계층의 시선으로 쓰여진 것이 다수였다. 물론 그들의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자적 시각에서의 문학은 시선의 사각지대와 왜곡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본작 「노동의 새벽」이 우리에게 더욱 소중하게만 다가온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상고 야간부를 졸업한 일반 노동자 출신이다. 그렇기에 그의 문학은 노동자들의 언어를 충실히 반영할 수 있었다. 내부자적 시각에서의 문학은 노동자들의 삶과 죽음을 절절히 담아냈다. 그러면서도 시문의 문학적 가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시집이 다른 노동 문학에 비하여 그 가치를 더욱 인정받는 것은 노동 문학이 갖는 현장성과 노동성의 중간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장시간의 노동과 저임금의 굴레, 손이 잘리고 목숨을 잃기 일쑤인 산업현장,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계급 모순을 고발하며 노동 해방의 그날을 향한 진군의 비정한 출사표를 던지는 일련의 구성에서 우리는 선연한 아픔과 투쟁의 당위성을 모두 느낄 수 있다.
만일 본작이 현장성만을 논하는 데 그쳤더라면 이는 그저 한 맺힌 노동자의 넋두리 수준뿐이었을 것이다. 만일 본작이 운동성만을 논하는 데 그쳤더라면 이는 그저 허공을 울리는 공허한 메아리 속에 담긴 선전·선동 문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집은 이 둘 모두를 성공적으로 잡아냈고, 「노동의 새벽」은 민중의 가슴을 파고드는 속이 꽉 들어찬 투쟁의 문학이 되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먹물이 배어드는 일은 피할 수 없던 것일까. 「노동의 새벽」이 세상에 나온 후 7년 뒤 그가 발표한 시집 「머리띠를 묶으며」를 읽어보았다. 나는 「머리띠를 묶으며」를 펼치며 7년의 시간 동안 한층 더 견고해진 박노해 시인의 생각과 시선을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변해 있었다. 현실을 자조하던 노동자 시인은 이제 머리띠를 묶고서 힘 잃은 구호를 외쳐댈 뿐이었다. '미제와 독점자본을 몰아내고 노동해방, 농민해방'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는 한층 거칠어졌지만 어딘가 맥이 빠진 모양새였다. 출소 이후의 그의 행보에 대해서는 변절과 진보 사이의 평이 오가지만, 이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를 그저 「노동의 새벽」의 시인으로만 기억하고 싶다.
나는 일전에 남긴 영화 〈파업전야〉에 대한 글(https://blog.naver.com/drunken_shrimp/223162952918)에서도 언급했듯, 노동자 민중의 아픔을 다룬 예술이 더 이상 생명력을 발하지 못하는 세상을 희망한다. 노동 문학의 가치는 현세의 대중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닌, 과거에는 이랬구나 정도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료의 가치로만 남길 바란다.
끝으로 이 시집에서 감명 깊게 읽은 시 몇 편을 남긴다.
긴 공장의 밤
시린 어깨 위로
피로가 한파처럼 몰려온다
드르륵 득득
미싱을 타고, 꿈결 같은 미상을 타고
두 알의 타이밍으로 철야를 버티는
시다의 언 손으로
장미빛 꿈을 잘라
이룰 수 없는 헛된 꿈을 싹뚝 잘라
피 흐르는 가죽본을 미싱대에 올린다
끝도 없이 올린다
아직은 시다
미싱대에 오르고 싶다
미싱을 타고
장군처럼 당당한 얼굴로 미싱을 타고
언 몸뚱아리 감싸 줄
따스한 옷을 만들고 싶다
찢겨진 살림을 깁고 싶다
떨려 오는 온몸을 소름치며
가위질 망치질로 다짐질하는
아직은 시다,
미싱을 타고 미싱을 타고
갈라진 세상 모오든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고 싶은
시다의 꿈으로
찬 바람 치는 공단거리를
허청이며 내달리는
왜소한 시다의 몸짓
파리한 이마 위로
새벽별 빛나다
박노해 - 시다의 꿈
오늘도 공단거리 찾아 헤맨다마는
검붉은 노을이 서울 하늘 뒤덮을 때까지
찾아 헤맨다마는
없구나 없구나
스물일곱 이 한 목숨
밥벌 자리 하나 없구나
토큰 한 개 달랑, 포장마차 막소주잔에 가슴 슴적시고
뿌리 없는 웃음 흐르는 아스팔트 위를
반짝이는 조명불빛 사이로
허청 허청
실업자로 걷는구나
10년 걸려 목메인 기름밥에
나의 노동은 일당 4,000원
오색영롱한 쇼윈도엔 온통 바겐세일 나붙고
지하도 옷장수 500원짜리 쉰 목청이 잦아들고
내 손목 이끄는 밤꽃의 하이얀 미소도
50% 바겐세일이구나
에라 씨팔,
나도 바겐세일이다
3,500원도 좋고 3,000원도 좋으니 팔려가라
바겐세일로 바겐세일로
다만, 내 이 슬픔도 절망도 분노까지 함께 사야 돼!
박노해 - 바겐세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