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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Feb 26. 2021

내 인생의 떡볶이

나는 떡볶이를 좋아한다.


정말로 좋아한다. 오죽하면 나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조차 내가 떡볶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 누군가 나에게 떡볶이가 왜 그렇게 좋냐고 묻고는 한다. 그러면 특별히 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냥 맛있어서 좋은걸 어쩌라는 말인가. 요즘은 방송에서 하도 음식의 맛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설명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도 어떤 음식의 맛에 대해 설명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떡볶이의 맛에 대해 설명할 재주도 없고, 그럴 필요도 잘 못 느낀다. 떡볶이는 그냥 맛있는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좋아할 때 어떤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것과 같다. (아, 그럼 떡볶이와 사랑에 빠진 건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가끔씩 옛날 일을 회상하게 되는데, 어젯밤에는 문득 예전에 먹었던 떡볶이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떡볶이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겨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진이 있다면 좋았겠지만, 당연하게도 내가 먹었던 떡볶이들의 사진은 하나도 없다.

요즘은 사람들이 음식 사진을 SNS에 많이 올리는데, 보통은 즉각적인 소통을 위해 올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음악이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시절을 떠올리게 하듯이, 음식도 우리들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지금 찍어서 남겨둔 음식 사진들을 잘 보관해 두면, 세월이 지나 단순한 음식 사진이 아닌, 추억을 소환하는 특별한 사진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서흥 국민학교 앞 50원짜리 떡볶이


나는 '국민학교' 세대다. '국민학교'라는 용어를 가급적 쓰지 않고, '초등학교'라는 용어를 쓰려고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추억을 소환할 때는 원래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그것이 일제의 잔재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가 다니던 국민학교 앞에 작은 떡볶이 집이 하나 있었다. 분식집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게, 떡볶이랑 튀김 정도만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집에서는 떡볶이를 50원어치씩 팔았다. 그 당시 물가를 얘기하자면, 오락실에서 오락 한판이 50원이었고, 짜장면 보통이 500원이었다.

50원짜리 떡볶이를 시키면 어른 새끼손가락만 한 밀떡 5개와 어른 엄지손톱만 한 어묵 1개가 나왔다. 얼마 안 되는 양이라 배가 찰 정도는 아니지만, 무척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양이 많지 않기 때문에, 항상 국물까지 다 마시고는 했다.

그때부터 떡볶이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자주 먹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시절 오락실에 푸우욱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50원이라도 생기면 무조건 오락실로 달려가던 나였다. 심지어는 돈이 없어도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때문에, 가끔 친구가 먹자고 할 때나 같이 먹었던 것 같다.

요즘, '옛날 떡볶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대체로 비슷한 맛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런 걸 보면, 그 시절에는 떡볶이 맛이 다 비슷했던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흥 국민학교 앞 50원짜리 떡볶이도 옛날 떡볶이 맛이었다.


제물포 뒷 역 떡볶이 골목


인천 제물포 뒷 역에 떡볶이 골목이 있었다. 한, 100미터쯤 되는 골목에 떡볶이 집이 즐비하게 있었다. 큰길 건너가 인천 전체 사립의 40%를 차지하던 큰 재단이었기 때문에, 학생 손님으로 늘 붐비는 곳이었다. 국민학교 시절에는 집과 거리가 있어서 자주 못 갔는데, 중학교를 그 재단에 있는 학교로 다니게 되면서 떡볶이 골목의 떡볶이를 자주 먹게 되었다.

최초로 먹었을 때의 가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500원으로 먹었던 기억은 있다. 떡볶이가 한 끼로 대접받기 한참 전이었지만, 이미 밥 대신 떡볶이를 먹을 때가 많았을 정도로 양이 충분했다. 제물포에서 어울리던 친구들과 많이 먹었지만, 혼자서 먹을 때도 많았다. 대학교 시절 제물포에서 내려서 집까지 걸어갈 때에도 종종 들려서 먹었던 기억이 있다. 생각해보니, 중학교 시절부터 대학교 시절까지, 내 인생에서 떡볶이를 가장 많이 사 먹은 골목이다.

많은 떡볶이 집 중에서도 내가 단골로 가는 곳이 있었다. 4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작은 가게였고, 그다지 깔끔하지도 않은 집이었다. 주인은 나이 지긋하신 할머니셨는데, 꽤 오래 장사를 하셨다. 내가 그 골목에서 떡볶이를 잘 사 먹지 않게 된 것이 그 집이 없어지고나서부터였던 것 같다. 맛은 특별할 것 없었지만 내 입맛에 잘 맞았고, 어묵은 별로 없이 거의 떡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재단에 있던 대학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초중고교에 다니는 학생수도 줄면서, 그 골목의 떡볶이집도 거의 없어졌다. 지금도 본가가 그쪽에 있기 때문에, 일 년에 몇 번 그 골목을 지나게 되는데, 북적했던 과거와 달리 스산한 풍경이, 지나갈 때마다 내 마음을 감상에 젖게 만든다.


북아현동 1,000원짜리 떡볶이


지금도 이 집이 있을지 잘 모르겠다. 2호선 아현역에서 내려서 북아현동 쪽으로 나가면 금방 만나게 되는 떡볶이 집이 하나 있었다. 간판도 따로 없었던 것 같고, 2층으로 구성되어 있는 집이었다. 이 집에서 떡볶이를 1인분에 1,000원씩 팔았는데 양도 푸짐했고, 맛도 있어서 대학생 시절 자주 먹었던 기억이 있다. 길쭉한 튀김 만두처럼 생긴 것도 있었고, 기억에는 계란도 들어있었던 것 같다. 90년대 중반이기 때문에 지금보다 물가가 많이 낮기는 하지만, 당시로써도 싸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시절 떡볶이와 더불어 많이 먹었던 음식이 순두부찌개였는데, 당시 순두부찌개 가격이 3500원 정도였던 것 같다.

재수할 때부터 대학교 시절까지, 정확히는 군대 가기 전까지 그 동네에서 살았는데, 돈이 풍족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격 때문에라도 떡볶이로 식사를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국민학교 시절, 중고등학교 시절의 떡볶이집은 이미 사라진 걸 확인했는데, 과연 이 시절의 떡볶이 집은 아직 있을까 궁금하다. 20년 이상 지났기 때문에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지만, 아직 있다면 한번 찾아가서 먹어보고 싶은 생각도 든다.

이 시절의 나는 대학생이었지만, 학교를 잘 가지 않는 대학생이었다. 게임에 푹 빠져서 게임 폐인으로 대학교 세 학기를 거의 날려먹었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오락실에 푹 빠져있던 아이가 대학에 와서도 게임에 푹 빠져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걱정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결국 게임업계에서 20년을 일하고 있으니, 그렇게 세월을 낭비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하고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그처럼 게임에 빠져서 두문불출하는 가운데, 살기 위해서 밥은 먹어야 했기 때문에, 누가 봐도 게임 폐인 같은 추리한 모습으로 분식집이나 떡볶이 집을 갈 때만 집을 나섰던 시절이다.


결혼 후 아내가 해준 떡볶이


내가 결혼을 할 거라고 잘 생각하지 않았고, 할 수 있을 거라고도 별로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은데, 어떻게 운이 닿아 좋은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 아내는 가끔 나에게 '먹고 싶은 것 있어?' 하고 묻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나의 대답은 늘 똑같았다. '떡볶이!!'

먹고 싶은 것이 늘 똑같으니 편할 것도 같지만, 똑같은 음식을 여러 번 하는 것도 그리 신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내는 여러 가지 다양한 버전의 떡볶이를 시도했다. 내 기억에 시중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버전의 떡볶이는 모두 집에서 한 번쯤 먹어본 것 같다. 다행히도, 아내가 해준 떡볶이는 모두 맛있었다. 스파게티 소스와 함께 했던 실험작 만이 유일하게 안 좋은 기억이다. 떡볶이에 대한 다양한 시도는 아이가 생기고, 아이가 밥을 먹게 되면서부터 중단되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아이가 생기면 먹는 것도 아이 위주로 바뀌는 법이다.

지금은 식탁에 떡볶이가 종종 올라온다. 작은 아이가 사춘기에 진입할 만큼 아이들이 모두 성장했고, 두 아이 모두 나처럼 떡볶이를 좋아한다. 생각해보면 떡볶이란 게 참 단순한 음식인데, 세대를 불문하고 인기를 얻는다는 것이 참 신기하게 느껴진다. 떡은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 거기에 소스를 얹은 것을 저리도 좋아하다니.


판교 떡볶이 모임


직장이 판교에 있다. 판교에 테크노밸리가 형성되면서 많은 게임회사들이 판교로 이전했다. 그래서 지금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는 동료들뿐만 아니라, 예전에 같이 일했던 지인들도 대부분 판교에 있었다. 회사는 달라도, 10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만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중에서 종종 점심 식사 시간에 만나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인원이 몇 명 있었다. 자주는 아니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같이 떡볶이를 먹었던 것 같다. 가는 집은 대부분 같은 집이었는데, 유명한 브랜드이고 워낙 손님이 많은 곳이라서 일반적인 점심시간보다 조금 일찍 가서 자리를 잡았다. 게임 회사들이 대체로 점심시간을 개인의 사정에 맞게 유동적으로 쓸 수 있도록 허용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나서 하는 얘기가 늘 비슷한 얘기지만, 좋은 사람들을 만나 맛있는 것을 먹으며 얘기를 나누는 자체가 직장 생활의 재미 중 하나였다. 그러던 것이, 코로나 때문에 만나기 어려워져서 모임을 가진 지 시간이 꽤 지났다. 그 와중에 그 지인들의 직장이 서울로 이전하는 바람에, 이제는 코로나가 사라져도 예전처럼 자주 만나기는 어렵게 됐다.

재택근무가 좋은 점도 있고, 처음보다는 많이 익숙해져서 일하는 데 크게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동안 직장 동료 및 지인들과 소통하는 기회가 많이 줄어들었다. 심지어, 같은 팀에 있는 팀원들과도 사적인 얘기를 할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 회의가 있을 때 일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정도가 대부분이다. 장기간의 원격 근무를 진행하면서 일은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직장 동료 간의 '관계'는 확실히 약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떡볶이만 먹고살 수 있을까?


재작년이었던 것 같다. 연속 다섯 끼를 떡볶이로 채운 적이 있다. 일부러 그랬다기보다는 약간의 우연이 겹치면서 일어난 일이다. 아내가 떡볶이를 해주고, 회사 구내식당 점심 메뉴 중 하나가 떡볶이로 나오고, 이미 잡혀있는 판교 떡볶이 모임이 있고, 거기에 혼자 사 먹은 두 번의 떡볶이 식사가 더해져서 연속으로 다섯 번의 떡볶이를 먹게 되었다. 다행히도, 같은 떡볶이를 두 번 먹은 경우는 없었는데, 그때 어쩌면 평생 떡볶이만 먹고도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 어떤 칼럼니스트가 떡볶이를 정크푸드라고 언급한 것을 기사로 읽고 약간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몸에 좋은 음식과 몸에 안 좋은 음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면서도 한 번도 떡볶이에 대해서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떡볶이가 정크푸드가 맞는지 아닌지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건강에 안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은 든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아무거나 마구 먹어서는 곤란한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떡볶이를 먹고 싶은 만큼 먹기 위해 다른 음식을 가려 먹기로 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할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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