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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Mar 26. 2021

내 인생의 게임

나는 게임을 좋아한다.


그것도 많이 좋아한다. 내가 게임을 처음 한 것이 몇 살 때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동네 오락실에서 갤러그를 하던 것이 거의 첫 기억인데, 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이니 아마 형을 따라서 간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오락실을 불량 학생들이 모이는 곳쯤으로 여기던 시절이다. 그래서 오락실을 출입하는 것만으로도 학교 선생님에게 혼이 났다. 하지만, 나는 착한 학생도 아니었고, 오락이 너무나도 좋았기 때문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락실을 다녔다. 당시 오락 한판에 50원이었는데, 매일 100원의 용돈을 받아 오락실에 모두 투자했다. 설날에 세뱃돈을 받아도 장난감을 사기보다 오락을 하기 바빴다.

개인적으로 문제를 풀어낼 때 성취감을 강하게 느끼는 편인데, 아마 그런 성향에 게임이 딱 맞는 것 같다. 결국 대학교 졸업하고 동기들은 대기업 입사를 준비할 때, 나는 바로 게임업계로 입문했다. 그리고 지금도 게임 회사를 다니고 있다.

게임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기억나는 게임도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게임 몇 가지만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한다.


봄 잭 - 끝나지 않는 게임


국민학교 시절에는 거의 오락실에서 살았다. 단골 오락실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모든 오락실을 다 섭렵했다. 돈이 있을 때뿐만 아니라 돈이 없을 때도 오락실에서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용을 거의 외우기 일쑤였고, 원래 게임에 소질도 있어 오락실에서 게임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어쩌면 칭찬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장소였기 때문에 오락실을 더 좋아했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오락 실력을 모두가 칭찬했고, 나랑 같이 오락을 하고 싶어 했지만, 유독 나의 오락 실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오락실 주인이었다. 오락실이란 게 회전율이 중요하고, 회전율이 높으려면 오락하는 사람이 빨리 게임 오버되어 다음 사람이 동전을 투입할 수 있게 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내가 오락기에 앉아 있으면 너무 오래 하기 때문에 오락실 매출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간혹 나에게 돈을 주며 그만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정당하게 동전을 투입하고 하는 것이니, 억지로 그만두게 할 수도 없고 출입을 금지할 수도 없었으니 그렇게라도 해야 했던 것 같다.

오락실에서 사는 인생이었기 때문에 안 한 오락이 없다시피 하지만, 그중에서도 한번 앉으면 오래 했던 기억이 나는 것이 '봄 잭'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슈퍼맨처럼 생긴 캐릭터가 적을 피해 다니면서 폭탄을 먹는 게임이다. 적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물리치지 못하고 피해 다녀야 하며, 폭탄을 다 먹으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게임이란 게, 스테이지를 넘어갈수록 점점 어려워지기 마련이지만, 간혹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더 이상 어려워지지 않고 스테이지만 반복되는 게임이 있다. 봄 잭이 그런 게임이다. 테트리스도 마찬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테트리스는 계속 집중력을 유지해야 하는 반면에, 봄 잭은 최고 난이도에서도 여유 있게 플레이가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잘 죽지도 않고, 게임을 하다 보면 오히려 보너스 기회만 늘어난다. 내 기억에 가장 오래 했던 때는 4시간 정도 한 것 같다. 마침 손님도 별로 없는 오락실이어서 주인아저씨도 아무 말하지 않았다. 

나이가 먹어서도 가끔 오락실을 갔는데, 천 원짜리 한 장이면 시간을 많이 때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 잘 안 가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은 예전만큼 잘하지는 못한다. 그래도 우리 애들보다는 잘해서, 어쩌다 오락실에서 오락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아이들이 놀랄 때가 있다.


마이트 앤드 매직 - 꿈과 모험의 세계


내가 게임을 영화나 드라마보다 좋아하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관객이 되어야 하지만 게임에서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리고 마이트 앤드 매직은 모험 속 주인공의 느낌을 가장 강하게 느끼게 해 준 게임이었다.

형이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 우리 집에는 컴퓨터가 생겼다. 형이 대학교에 입학한 기념으로 어머니께서 형에게 사준 것이다. 형도 나 못지 않게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형을 통해서 나는 컴퓨터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락실에서 하는 게임은 거의 액션 게임이나 퍼즐 게임 같은 것이었는데, 컴퓨터로 하는 게임에는 좀 더 다양한 장르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롤플레잉이라 불리는 게임들은 오락실에서는 하기 힘든 게임이었고 내 흥미를 강하게 끌어당긴 게임이었다.

롤플레잉 게임이란, 대체로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배경에서 반지 원정대 같은 영웅 무리를 이끌면서, 악당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하는 내용의 게임이다. 게임 속에 작은 모험들도 많고, 여러 가지 괴물들도 많으며, 재미있는 이야기와 신기한 퍼즐들이 넘쳐났다.

롤플레잉 게임에도 여러 게임들이 있지만, 그중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게임이 마이트 앤드 매직이다. 원래 자유도가 높은 게임인 데다가, 설명서 같은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플레이하고 나름대로 즐겼던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당시 중학생이었던 내게 게임의 영어는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무엇을 해야 대망의 엔딩을 맞을지 알 수가 없었다. 롤플레잉 게임은 보통 퍼즐처럼 엮인 미션을 해결해야 마지막을 향해 갈 수 있는데, 그 퍼즐이 무엇인지 조차 알아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같은 이유로, 당시 롤플레잉 게임 중 엔딩을 본 게임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그 과정 자체가 너무 재밌어서 여러 가지 롤플레잉 게임을 섭렵했다.

어른이 되어서 마이트 앤드 매직을 다시 했다. 어른이 되고 나니 게임 속 영어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모험을 완수하는 것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름대로 멋진 엔딩을 보기는 했지만, 어렸을 때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문명 - 내 학점을 선동렬 방어율로 만든 주범


대학교 2학년 때 게임에 빠져서 학교도 잘 안 가고, 정말 폐인처럼 살았다. 누나와 둘이 자취하고 있었는데, 근방에 마침 게임 CD를 대여하는 곳도 있어서 많은 게임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문명'이 내 대학생활에 치명타를 날렸다.

문명은 하나의 문명을 건설한 후, 고대시대부터 미래시대로 흐르는 동안 다른 문명과 경쟁을 하는 게임이다. 과학을 빨리 발전시켜서 승리할 수도 있고, 전쟁을 벌여서 정복으로 승리할 수도 있다. 각 문명이 돌아가면서 한 턴씩 진행하는 턴제 게임이었는데, 효율적인 선택을 해야 다른 문명보다 우위에 설 수 있다. 턴제 게임이다 보니 스타크래프트처럼 빠르게 무언가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치밀한 계산을 통해 전략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런 점이 내 성향과 잘 맞았던 것 같다.

게이머들이 잘 알고 있는 표현 중에 '문명하셨다'라는 표현이 있다. 죽음을 나타내는 '운명하셨다'에 '문명'을 결합한 표현이다. 문명에 빠져서 삶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쓰는 비유적 표현인데, 당시의 나는 말 그대로 '문명하신' 셈이다.

중독성이 강해서 시간을 건너뛰게 만드는 이런 게임들에 '악마의 게임'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대표적인 악마의 게임에는 '디아블로' 같은 것이 있다. 시험을 앞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설치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게임이다. 설치하는 순간, 마치 수면 마취를 한 것 같은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험 날짜가 지난 뒤가 된다.

나에게는 문명이 악마의 게임이었던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내 대학 학점에 치명타를 날린 악마의 게임이지만, 게임 제작자로서의 나에게는 이만큼 귀한 자원도 없다는 것이다. 몰입감이 강하다는 것은 그만큼 설계가 잘 된 게임이라는 뜻이고, 게임 제작자로서 배울 것이 많은 게임이다.

요즘에는 게임 기법을 도입하여 이용자의 몰입을 강화하고자 하는 서비스들이 많은데, 그런 서비스를 기획하는 사람들에게도 악마의 게임들은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 최초의 '국민 게임'


스물넷에 군대를 갔다. 군대를 가기 직전에 PC방이라는 것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PC방에서 사람들이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했다. 2년 2개월 후 제대를 했는데 그때도 스타크래프트의 인기는 크게 식지 않았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스타크래프트를 하기 시작해서 직장 생활 3,4년 차 정도까지 많이 했던 것 같다.

스타크래프트는 보통 RTS라 불리는 실시간 대전 게임이다. 두 명 이상의 유저가 전쟁 무기를 가지고 전투를 벌이는 데, 장기나 바둑처럼 차례차례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플레이어가 동시에 자신의 무기들을 움직이며 전투를 벌이는 게임이다.

원래 실시간 대전 게임을 잘하지 않는 편인데, 당시 스타크래프트는 게임을 안 좋아하는 사람들도 끌어들일 만큼 대단한 인기를 가진 게임이었으니, 자연스럽게 나도 많이 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20대 후반이어서 어렸을 때만큼 게임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직장인들 중에서는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던 것 같다. 언젠가 회사에서 스타크래프트 대회를 했는데, 어느 팀에서 결원이 생기자 용병으로 불려 가기도 했고, 팀 동료들끼리 한 게임에서 1:2로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손이 빠르지 않은 편이었지만,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였고, 전략적인 판단이 괜찮아서 곧잘 이겼다.

게임을 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사실 스타크래프트는 직접 플레이하는 것보다 프로 게이머의 플레이를 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게임 방송에서 어지간한 대회는 다 챙겨본 것 같고,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임요환의 플레이를 가장 좋아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게임은 '3 연속 벙커'로 유명한 임요환과 홍진호의 대결이었는데, 당시 3 연속 벙커 전략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알아채면 오히려 당하는 쪽이 유리해지는 전략을 계속 제대로 체크하지 않은 홍진호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스타크래프트나, 요즘 가장 인기 있는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실시간 대전 게임은 아예 하지 않는다. 몸이 게임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적당히 즐기면서 하면 되지만, 지는 것을 별로 안 좋아하는 성격이다 보니 잘 안 하게 된다. 그래도 리그 오브 레전드의 프로 게이머 경기들을 보는 것은 내 주요 취미 활동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호라이즌 제로 던 - 잘 만든 한 편의 영화


플레이스테이션이나 엑스박스 같은 게임용 기기들을 콘솔이라고 부르고, 이 콘솔에서 구동되는 게임들을 콘솔 게임이라고 부른다. 나는 원래 콘솔 게임은 거의 하지 않았다. 콘솔을 사본 적도 없다. 그러던 것이, 재작년 회사 AI 대회에서 엑스박스를 덜컥 상으로 받더니, 몇 개월 후 포커 대회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또 덜컥 상으로 받게 되었다. 그래서 졸지에 대표적인 콘솔 기기를 두 개나 갖게 되었다.

그래도 처음에는 콘솔 게임을 잘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서재에 플레이스테이션과 모니터를 설치하고 몇몇 게임을 구매하여 플레이했다. 가장 인기가 있고 평이 좋은 게임들을 선택했고, 그 게임들이 왜 명성을 얻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참 감명 깊은 게임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호라이즌 제로 던'이라는 게임이다.

1인칭 게임이고,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는 게임이다. 배경이 독특한데, 문명이 멸망하고 지식이 모두 사라져서, 소수만 남은 인류가 로마 시대쯤으로 퇴보한 듯한 문명을 형성한 채 살아가고 있다. 멸망하기 전 과학 문명의 잔해들도 여기저기 있고, 기계로 이루어진 동물들이 자연에 흩어져 있다.

주인공은 사냥에 능한 10대 여성인데, 처음에는 마을을 침략한 침략자를 쫓기 위해 모험에 나섰다가 점차 지금의 세계와 과거의 문명을 연결하는 커다란 비밀을 하나씩 밝혀내게 된다.

기본적으로 세계관이나 설정이 너무 좋다. 참신한 면도 있고, 개연성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야기가 점차 밝혀지는 구성도 치밀하게 잘 설계해 놓아서, 정말 잘 만든 한 편의 영화를 감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이 게임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어도 좋은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튜브에 스토리만 정리해서 영화처럼 만들어 놓은 영상이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찾아봐도 좋을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집에 있는 콘솔은 플레이스테이션 4인데, 호라이즌 제로 던의 후속 편은 플레이스테이션 5용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후속 편도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게임기를 사기는 좀 아깝다. 회사에서 포커 대회나 AI 대회를 한번 더 개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즐겁게 만들어 주었던 게임들


일본 드라마 중에 '로스 타임 라이프'라는 옴니버스식 드라마가 있다. 어떤 사람이 죽기 전에, 그 사람이 낭비했던 시간을 돌려주고 그만큼 더 살게 한 후 죽게 하는 내용이다. 축구의 로스 타임처럼 인생의 로스 타임을 받는 독특한 컨셉의 드라마다.(그래서 딱 한편 빼고는 전부 주인공이 죽으면서 끝난다.)

내가 게임을 했던 시간들을 돌려받는다면, 내 수명이 몇 년은 더 늘어나지 않을까 싶다. 물론, 나는 그 시간이 낭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만들었던 시간들이니까 말이다.

지금은 게임을 그렇게 많이 하지는 않는다. 게임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내 스트레스를 푸는 데는 게임만 한 것이 없다. 앞으로 몇 개의 게임이 내 인생에 더 기록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죽기 직전에도 게임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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