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누구에게나 이름이 있지만, 옛날에는 이름이 없는 사람이 많았다. 물론, 다른 사람과 구분하여 부르는 호칭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을 '이름'이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 사람들에게 이름이 없었던 것은 그들의 존재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존엄을 인정받는 사람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평등'의 개념이 전파되면서 모든 사람의 존엄이 인정받게 되었고,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진짜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무언가를 다른 것과 구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이름이다.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에는 이름이 붙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이름을 붙인다는 것은 '고유성'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아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고유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행위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가지게 되는 소유물이 이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심지어는 이름을 자신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래서 자신과 이름이 비슷한 사람만 봐도 반가움을 느끼고 친근감을 느낀다. 단순한 광고성 우편물이더라도, 보낸 사람의 이름이 자신의 이름과 비슷하면 우호적으로 대한다는 것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이름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애정 하는 동물과 물건에도 이름을 붙인다. 이름이 없을 때는 그냥 한 마리의 강아지였던 것이, 이름을 붙이는 순간 가족의 일원이 된다. 이름이 없을 때는 그냥 한 대의 자동차였던 것이, 이름을 붙이는 순간 삶을 함께 나누는 동반자가 된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름이 생기는 순간, 그것은 영혼을 가진 것으로 취급받는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을 상대하는 인공지능들도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름을 붙일 때는 굉장히 신중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운명에 대한 이름의 영향력을 믿는다. 아이의 이름은 물론이고, 회사의 이름,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지을 때도, 그 이름이 대상의 미래에 미칠 영향을 고려한다. 심지어 운명을 믿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가급적 나쁘게 느껴지는 이름은 피하고 싶어 한다. 사실, 운명이 실재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감이라는 것은 실재하기 때문에, 이름을 잘 생각해서 지어야 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간혹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사람의 이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고, 물건이나 집단의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있다. 이름이 단순히 구분자의 역할을 할 뿐이라면 이름을 바꿀 이유는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름에는 구분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름에는 누군가의 소망이 담겨 있기도 하고, 역사가 담겨 있기도 하며, 소유자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래서 이름에 담겨 있는 것을 바꾸고자 할 때, 이름을 바꾸는 일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예전부터 영원한 삶을 꿈꾸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룰 수 없는 영생의 꿈을 이름에 담았다.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도 이름은 이 세상에 남아 자신을 대신해 주기를 바랐다. 실제로 많은 이름들이 영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영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름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태어날 때는 이름을 지은 사람의 소망만 담겨있을 뿐, 소유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이름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름에는 소유자의 삶이 담기기 시작한다. 소유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따라, 그 이름을 보는 사람들의 느낌과 감정이 달라진다. 소유자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소유자의 삶은 이름에 남아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속을 드나든다. 첫 번째 소유물이었던 이름이, 소유자를 기록하는 마지막 기록물이 된다.
나는 이제까지 내 이름에 무엇을 남겼을까? 내 이름을 보는 사람들의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앞으로 나는 내 이름에 또 무엇을 기록하게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내 이름에 담긴 기록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내 이름을 부르는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그러니 가급적 좋은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해봐야겠다. 내 이름이 누군가에게 좋은 기록물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