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고향, 파리

by 취한하늘

나는 파리를 좋아한다. 파리 방문을 네 번 정도 했고, 그 네 번 동안의 체류 기간을 합치면 한 달 정도는 되는 것 같다. 네 번째 갔을 때는 튈르리 정원에서 책 보는 것을 즐기다 왔을 정도로, 나에게 파리는 여행지라기보다는 고향 같은 느낌이 있다.


생각해보면 파리보다는 프랑스에 대한 애착이 먼저였던 것 같다. 역사를 좋아해서 공대생임에도 불구하고 교양 과목으로 역사 관련 강의만 십여 개 들었다. 역사 중에서도 유럽사를 좋아했고, 그중에서 프랑스 역사를 좋아했는데, 아마도 프랑스 혁명에 대한 내용이 나를 강하게 끌어당긴 것이 아닌가 싶다. 영국 혁명사도 보고, 러시아 혁명사도 봤지만, 프랑스 혁명사만큼 역동적인 역사는 없었던 것 같다.


파리를 좋아하고, 여러 번 방문했지만, 막상 파리를 구석구석 다니는 편은 아니었다. 그냥 센 강 주변에서 느긋하게 하루 일과를 보내는 것이 좋았다. 앉으면 자연스럽게 하늘을 보게 되는 튈르리 정원의 의자가 좋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에펠탑을 올려다보며 먹는 기분이 좋았다.


에펠탑은 세 번 정도 올라가 봤는데, 에펠탑을 올라가는 이유는 그냥 '나 에펠탑 올라가 봤어'라고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사실 에펠탑에서 내려다본 파리 풍경은 크게 감흥이 없었다. 오히려 파리 여기저기서 바라보는 에펠탑의 광경이 더 멋있다. 그러고 보면 에펠탑을 보지 않기 위해 매일 에펠탑에서 식사를 한 모파상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관광객이 많은 도시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파리에 있으면 전반적으로 여유가 느껴진다. 뭔가 바쁘게 돌아간다는 느낌은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 사람들은 일을 안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은 있는 것 같다.


인상파를 좋아하기 때문에, 루브르 박물관보다는 오르세 미술관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원래 그림 보는 것에 별로 취미가 없었는데, 첫 유럽 여행 때 인상파의 그림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영상이나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의 차이가 너무 컸다. 극사실주의가 아닌데도, 나에게는 극사실주의 그림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마네의 그림과 고흐의 그림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론 강의 별이 빛나는 밤'은 진짜 별을 가져다 박아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첫 여행 때는 하도 그림을 많이 보고 다녀서, 한국 돌아와서 어느 카페에 걸린 처음 보는 그림을 보고도 누가 그린 것인지 맞힐 수 있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다시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다.


파리를 갈 때마다 노트르담 앞에 있는 포앵 제로를 밟고 온다. 포앵 제로를 밟으면 파리에 다시 오게 된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속설 같은 것은 잘 안 믿는 편이지만, 포앵 제로만큼은 늘 믿어본다. 실제로 밟을 때마다 다시 가게 되었기도 하니 말이다.

노트르담 뒤에 있는 작은 공원도 한적하게 책 읽기에 참 좋은 장소였는데, 노트르담이 화재로 훼손되고, 그 주변이 납으로 오염되었다니 참 안타깝다.


에펠탑 주변에는 에펠탑 모형을 파는 흑인들이 많이 있다. 아프리카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던 것 같다. 단속이 뜨면 흩어졌다가, 단속이 사라지면 다시 금방 모여들곤 했는데, 한 번은 한국말을 하는 흑인을 만나기도 했다. 보통 자국어로 얘기를 해주면 여행자들이 물건을 더 잘 사주기 때문에, 간단한 말 정도는 여러 나라 말로 익혀두는 것 같은데, 그 흑인은 한국말을 꽤나 여러 가지 할 줄 알아서, 약간의 대화가 가능했다. 장사를 위해 언어까지 공부하는 노력이 좋게 보여서, 어차피 사려고 했던 것은 모두 그 사람에게서 샀던 기억이 난다.


5, 6월에만 세 번 방문하다가 네 번째 방문은 9월 정도에 했는데, 파리의 가을도 참 운치가 있었다. 에펠탑과 노트르담 사이의 공간은 대개 걸어서 다니는데, 튈르리 정원에서 샹젤리제 거리까지 걸어가는 길 중간에, 나무들 사이로 낙엽이 쌓여있던 공간이 지금도 생각난다. 겨울에 눈이 내리면 또 어떤 풍경일지 궁금하다.


파리에는 산이 없다. 파리에만 없는 게 아니라, 대서양과 파리 사이에도 산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초여름에도 밤바람이 꽤나 쌀쌀하다. 그리고 해가 무척 길다. 6월만 해도 야경을 보려면 9시는 되어야 했던 것 같다. 덕분에 구경 다니기는 좋다.


서양 음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어서 프랑스 음식에 대해 특별한 기억은 없다. 다만, 어느 한식당에서 먹었던 된장찌개가 생각난다. 나이 지긋하신 부부가 운영하는 한식당이었는데, 된장찌개가 한국에 있는 식당에서도 먹기 힘든, 제대로 된 옛날식 된장찌개였다. 외국에서 한국 음식 먹고 만족해 본 적이 손에 꼽을 정도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맛이었던 한국 음식이다.


코로나 때문에 바다 건너로 가지를 못하니 언제 또 파리를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여러 번 가봤고, 아직 못 가본 여행지들이 잔뜩 있지만, 코로나가 없어지면 제일 먼저 가보고 싶은 곳이 또 파리다. 가보지 않은 곳을 가서 새로운 것들을 만나는 것도 재미있지만, 가봤던 곳을 다시 가서 낯섦과 익숙함을 같이 맛보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다음번에는 정말 파리의 겨울을 보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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