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런던, 모나코, 베네치아, 암스테르담, 싱가포르, 홍콩, 라스베이거스, 방콕 등, 여행이나 출장으로 방문해 본 도시는 여럿 있다. 하지만 내가 '거주자' 신분으로 있어 본 곳은 일본의 도쿄가 유일하다. 2006년에 회사의 일본 지사에서 일하게 되어 약 4개월 정도 도쿄에서 살았다. 그래서 해외에 있는 도시 중에서 내가 가장 잘 아는 도시도 도쿄일 것 같다.
그렇게 방문도 많이 했고, 살기까지 했던 도시인데도, 어쩐 일인지 내 기억 속에서 한동안 사라져 있었던 것 같다. 도시에 대해 글을 쓰려고, 그동안 방문했던 도시들을 나열해 봤는데, 처음에는 그 목록에 도쿄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 내가 도쿄에서 살았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도쿄에 대해 쓰려고 작정하고 나니, 억지로 구겨 넣어진 물건들이 터진 봉투 아래로 우수수 떨어지듯, 온갖 기억이 머릿속에 쏟아지고 있다. 쏟아진 것들을 전부 주워 담기에는,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다. 미처 못 담은 것들은 다음 기회에 다시 써보기로 하고, 일단은 몇 가지 생각의 조각들만 주섬주섬 주워서 담아본다.
회사는 신주쿠에 있었고, 나는 신주쿠와 비교적 가까운 나카노에 거주했다. 그리고 내가 거주했던 곳에서 가까운 곳에 만다라케라는 곳이 있었다. 사실 일본에 거주하기 전에는 만다라케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저 여행 책자를 보니 집에서 가까운 곳에 만다라케라는 곳이 있었고, 여러 가지 장난감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아 방문했던 것 같다.
막상 만다라케에 가보니, 그곳은 마치 별천지 같았다. 키덜트들이 좋아할 만한 것이 잔뜩 있었는데, 규모도 상당해서 다 구경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다. 그나마 나는 피겨 외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피겨 위주로만 구경을 했다.
내가 피겨를 처음 모으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때다. 만다라케에는 중고 피겨가 많았다. 새 제품에 비해 훨씬 싼 가격으로 피겨를 모을 수 있었고, 내가 좋아하는 건담 로봇 피겨는 특히 가격이 그다지 높지 않은 편이었기 때문에,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 종종 방문해서 건담 피겨를 많이 모았다. 지금도 내 장식장에는 이때 모은 피겨가 많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 있는 도시를 방문할 때도 종종 피겨 샵을 검색하여 찾아가고는 하였는데, 일본 외의 국가에서는 건담 피겨를 잘 취급하지 않고, 드래곤볼이나 원피스의 인물 피겨가 대세여서, 이때 이후로는 건담 피겨를 많이 모을 수 없었다.
해외에 있는 도시를 방문하면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 것이 가장 성가시다. 나는 느끼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서양에 있는 도시를 방문할 때 특히 음식 고민이 많다. 그렇다고 외국에서 한국 음식을 먹기에는, 가격은 한국의 2, 3배가량 되면서 맛은 별로일 때가 많아, 한국 음식이 정말 먹고 싶을 때만 한 번씩 먹는다.
그런데 도쿄는 음식 고민을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곳이었다. 음식이 전부 입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입에 맞는 음식이 많아 매 끼니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특히, 초밥의 경우에는 거리에 보이는 아무 초밥집이나 들어가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내 기억에 초밥집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저가로 승부하는 100엔 초밥집들 조차도 맛있었다. 오히려, 나중에 한국에 복귀한 후 한동안 맛있는 초밥을 먹지 못했다. 가격이 꽤 하는 고급 초밥집 조차도 일본 거리의 100엔 초밥보다 맛이 없어 많이 실망했다. 지금은 한국에서도 맛있는 초밥집이 여러 군데 생겨서 가끔씩 초밥을 먹고 있다.
우동도 도쿄에서 먹은 우동이 참 맛있었다. 그때는 한국에 아직 일본식 면요리가 흔하지 않을 때다. 한국에서 먹는 우동은 다소 잘 부서지는 느낌이었는데, 도쿄에서 먹은 우동은 면이 탱탱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 외에 카레나 돈가스 같은 것들도 먹을만했다.
도쿄에서 음식을 먹을 때 다소 불편한 것은 '양'이었다. 가격은 싸지 않은데 음식의 양이 적었다. 반찬은 원래 잘 안 먹었기 때문에 안 줘도 별로 상관이 없었는데, 메인 음식의 양이 적은 것은 좀 불편했다. 특히 생선구이 같은 것은, 맛은 너무 좋았지만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느낌이 강했다.
도쿄에서 함부로 먹지 못한 것이 하나 있는데, 편의점 김밥이었다. 일본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무엇인지 구분하기 힘들었고, 한자를 보면서 대강 유추해서 구매했다. 그런데 맛있게 먹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도쿄에는 디즈니 랜드가 있다. 정확히는 '디즈니 랜드'와 '디즈니 씨'가 있다. 디즈니 랜드는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곳이고, 디즈니 씨는 어른들에게 스릴과 재미를 주는 곳이다.
나는 놀이공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놀이시설을 무서워서 못 탄다. 그러니 놀이공원에 가도 그다지 할 것이 없다. 그런데 도쿄 디즈니는 여러 번 방문했다. 기억이 정확히 나지는 않지만, 도쿄 디즈니는 공연 같은 것도 많이 해서, 어트랙션 외에도 재밌게 즐길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 있었던 것 같다.
도쿄 디즈니를 주로 직장 동료들과 함께 갔다. 지금도 친하게 지내는 동생들과 두어 번 간 것 같다. 그리고 그 시절의 나는 차마 무서워서 못 탄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생들이 타자고 하는 것은 전부 따라서 타게 되었다. 내가 롤러코스터를 탄 것은 그 시절이 유일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무리 체면이 중요하다고 해도 그것을 어떻게 탔는가 싶다. 롤러코스터가 높은 지점을 향해 천천히 올라갈 때부터 심장이 쿵쾅쿵쾅 거리다가 꼭짓점을 찍고 밑으로 훅 떨어질 때면 내가 지금 여기에 앉아있는 것을 후회하고는 했던 것 같다.
특히 기억나는 어트랙션이 하나 있다. 지하 세계 탐험 같은 테마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열차 같은 것을 타고 빠르게 내달리지만, 어두운 실내였기 때문에 그럭저럭 괜찮았다. 가끔 무언가 불쑥 나타나서 깜짝 놀라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갑자기 멀리 불빛이 보여서, 이제 끝나려나 보다 생각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불빛을 통과하고 나니, 내가 타고 있는 열차는 야외로 나와 지상으로부터 가장 높은 곳에 있었고, 조만간 수직으로 떨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나는 또 낙하를 경험하게 되었다.
지금은 어디를 가도 그냥 무서워서 못 탄다고 말한다. 체면보다는 심장을 지키는 게 낫다.
주말에는 회사 동료들과 어울릴 때도 있었지만, 혼자서 도쿄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때도 많이 있었다. 도쿄는 구경할 곳이 많아서 혼자서 돌아다니는 것도 상당히 재미있었다. 신주쿠와 시부야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유명한 쇼핑센터를 구경 다니기도 하고, 지유가오카 같은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했다.
도쿄는 웅장한 멋보다는 아기자기한 멋을 더 많이 품고 있는 도시 같았다. 작은 가게와 작은 소품들이 재밌는 것이 많았다. 비슷한 느낌을 나중에 베네치아에서도 받았는데, 베네치아는 작은 도시라서 도시 전체가 일정한 테마를 가지고 있는 느낌이라면, 도쿄는 지역마다 조금씩 특색이 느껴졌던 것 같다.
도쿄에서 살기 시작한 초반에, 중고 세탁기 같은 것을 사려고 리사이클 센터를 찾아 돌아다녔다. 결국 가전제품은 나중에 유명 쇼핑몰에서 구매하게 되었지만, 리사이클 센터를 돌아다니느라고, 여행 책자에 나오지 않는 동네를 여러 군데 돌아다니게 되었다. 신주쿠나 시부야 같이 사람이 북적대는 곳이 아닌, 외국인은 잘 보이지 않는 약간 외곽 지역을 돌아다녔던 것 같은데, 그 동네들을 돌아다니면서 봤던 풍경들이 좀 더 일본 영화에 나오는 풍경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쇼핑몰 중에서는 도큐핸즈를 많이 방문했던 것 같다. 생활 잡화를 파는 대형 쇼핑몰인데, 그 안에서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는 것이 재밌었다. 혼자 사는 동안 필요한 물건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대체로 구경만 했다. 나중에 한국에 복귀하기 전에 보드게임을 몇 개 샀던 기억만 있다.
일찍부터 땅값이 비싸고 방문하는 외국인이 많아서 그런지, 도쿄는 도시 전체를 다양한 테마로 잘 꾸며놓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굳이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다양한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일본에 거주할 때가 첫째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래서 일본에 있는 동안 2주마다 한국을 방문했다. 첫째는 2주마다 만나는 나를 낯설어하는 것 같았다. 나중에 한국에 복귀한 후에도, 첫째와 친해지는데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
일본에서는 여행을 갔다 오면 선물을 사 오는 풍습 같은 게 있다. 주로 먹을 것을 사 와서 나눠먹는데, 이것을 오미야게라고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에 다녀올 때마다 사무실에 먹을 것을 조금씩 가져다 놓았는데, 주로 많이 가져다 놓았던 것이 '김'이다.
일본 사람들은 한국의 김을 좋아했다. 일본에도 김이 있지만, 일본의 김은 바삭하지 않고 양념도 잘 되어 있지 않았던 것 같다. 반면, 한국의 김은 바삭하면서 양념이 잘 되어 있어, 내가 아는 일본 사람은 모두 한국 김을 좋아했다. 2차 대전 때 일본군에 포로로 잡혔던 미국 병사가, 미국에 귀국한 후에 '일본인이 까만 종이를 먹으라고 줘서 힘들었다'는 얘기를 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일본의 김을 생각하면 미국 병사가 충분히 오해할 만도 한 것 같다.
반대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올 때도 먹을 것을 이것저것 사 가지고 왔다. 주로 공항에서 파는 모찌나 병아리 빵 같은 것을 사 왔던 것 같은데, 한 번은 시내 쇼핑몰에서 일본 카레를 잔뜩 사 가지고 왔던 적이 있다. 한국에서 3분 만에 먹는 카레만 먹던 내게, 일본의 카레는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카레를 여러 개 사 가지고 한국에 왔고, 아는 동네 사람들에게 카레를 나눠줬던 기억이 난다. 그즈음 우리 동네에는 일본식 카레 냄새가 가득했다.
한국 사람에게 일본은 가까우면서도 여러 가지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해외 여행지였다. 나도 일본 법인에서 일할 때 외에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여러 번 있다. 여행으로 갈 때도 있었고, 도쿄에서 열리는 게임쇼를 참관하고자 갈 때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로는 한 번도 가지 않게 되었다.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랫동안 일본을 방문하지는 않을 것 같다.
도쿄에서 지내는 동안 도쿄가 혼자 지내기에는 참 좋은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내가 외국인이라서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고, 월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서 그랬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다녀본 해외의 여러 도시 중에서 혼자서 지내기에 가장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과연 언제쯤 도쿄를 다시 방문하게 될지 모르겠다. 금방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한 번 도쿄에 가서 추억의 장소들을 돌아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기억 속의 장소들이 어떻게 바뀌어 있을지, 함부로 가지 못하는 곳이 되고 나니 더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