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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Nov 07. 2022

창발성? 창발성!

게임 업계에서 꽤 오래 일한 후에나 알게 된 개념이 있다. 바로 '창발성'이다. 프로그래머로서 일할 때는 전혀 몰랐다가, 게임 기획에 대해 공부하던 시절에 알게 됐다. 현장에서 잘 사용하는 말은 아니어서, 게임 업계에서도 흔한 용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그 개념 자체는 대체로 중요하게 생각되는 개념이다.


'창발성'을 검색해 보니, '하위계층(구성 요소)에는 없는 특성이나 행동이 상위계층(전체 구조)에서 자발적으로 돌연히 출현하는 현상'이라는 설명이 있다.(동아사이언스, '창발성'의 참뜻 아십니까, 2001. 04. 06) 설명을 읽어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창발성이 높은 게임인 바둑을 예로 들면 '게임에서의 창발성'을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바둑의 규칙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돌을 놓는 규칙, 돌을 드러내는 규칙이 몇 가지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규칙으로 이루어진 게임이 엄청나게 많은 양상으로 발전한다. 단순히 돌을 놓는 경우의 수가 많은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 있는 전술적 변화가 수도 없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그런 높은 창발성 때문에, 알파고 이전의 머신들이 높은 연산량으로도 사람을 따라잡기 어려워했던 것이다.


반대로, 창발성이 낮은 게임으로 슬롯머신 게임이 있다. 슬롯머신 게임은 버튼을 누르면 확률에 의해 정해지는 결과가 나오는 것이 전부다. 이전 게임이 다음 게임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못하며, 간혹 영향을 조금 미치도록 설계된 머신도 그 영향의 정도가 미미하다. 그래서, 슬롯머신은 사전에 정의된 규칙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무언가가 별로 없다.


창발성은 콘텐츠 자체에 내재된 특성이다. 콘텐츠를 운영하면서 생기는 특성이 아니라, 콘텐츠를 설계했을 때 이미 결정되는 특성이라는 얘기다. 이후에는, 그 창발성을 잘 활용하는 경우와 활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바둑의 창발성은 바둑의 규칙이 정립된 시기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으로, 이후에 여러 가지 정석이나 전술이 개발되면서 그 창발성이 발견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창발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다양한 양상을 만들어내고, 그로부터 질리지 않는 재미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바둑에 높은 창발성이 없었다면, 그렇게 단순한 규칙으로 몇 백 년 동안 사랑받는 게임이 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컴퓨터 게임이나 모바일 게임의 경우에도, 창발성이 높으면 다양한 기호를 가진 사람들을 오래 붙잡아두는 데 유리하다. 창발성이 낮은 게임 중에도 흥행이 잘 되는 게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게임들은 고객 집단이 제한적이거나, 유지보수에 커다란 비용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


게임에서만 창발성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개그콘서트가 전성기를 누릴 때는 창발성이 좋은 코너들이 많이 있었고, 그런 코너들은 오랜 기간 사랑받았다. 예를 들어, '시청자의 제왕' 같은 코너는 설계 자체가 변주를 주기 좋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 코너를 반복하면서도, 새로운 요소를 첨가하거나 기존 요소를 변형하면서 계속 재미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반면, '출소' 같은 코너는 다양한 변주가 어려운 설계였다. 그래서, 충분히 재미를 만들어 내기는 했지만, 오래 지속할 수는 없었다. 그 밖에, 여러 시즌에 걸쳐 제작되는 해외의 드라마들도, 애초의 설계에 높은 창발성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창발성이 어디서나 중요한 것은 아니다. 아마, 영화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을 두고 같은 고객으로부터 반복적인 선택을 받아야 하는 콘텐츠라면, 한 번쯤 깊이 생각해봐야 할 개념이 아닌가 싶다. 어쩌면 게임의 기법을 적용하려는 다른 서비스들에서도, 고려해 볼만한 개념이 아닐까 하여 한 번 소개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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