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역사를 좋아하지만, 막상 로마라는 도시에는 크게 흥미가 없었다. 배낭여행을 할 때도 경로가 애매하다는 이유로 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나중에 로마만 따로 여행하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왜 로마를 좋아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박물관에 가서 도시의 옛 모습을 확인하고는 했는데, 로마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시 자체가 옛 문명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만날 수 있는 고대 로마의 흔적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아마 콜로세움일 것이다. 파리에는 에펠탑, 런던에는 빅벤이 있다면, 로마에는 콜로세움이 있다. 다만, 건축물이 품고 있는 세월과 그 공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생각하면, 에펠탑과 빅벤은 도저히 콜로세움에 비견할 수 없을 것 같다.
콜로세움의 외형은 어지간한 사람은 다 알만큼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의 내부 모습은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내부는 마치 발굴 현장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도 들어가 보기 전에는 영화에 나온 것 같은 평평한 바닥과 주변의 좌석들을 상상했기 때문에, 처음 들어갔을 때는 다소 놀랐다. 그래도 웅장함은 충분히 느껴졌고, 당시의 장면을 상상하기에도 부족함은 없었다.
콜로세움 주변으로 포로 로마노가 있다. '포로(foro)'는 영어의 '포럼(forum)'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고,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꽤 넓은 공간에 고대 로마의 흔적이 펼쳐져 있다. 온전하게 보전된 것은 아니지만, 서로마가 멸망한 지 1,500년이 넘은 것을 생각하면 꽤 잘 남아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포로 로마노를 걸어 다니면서, 마치 고대 로마의 거리를 걸어 다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당시에는 유럽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가 바로 이 거리였을 것이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장소가 이제 부서지고 깎여나간 모습으로 구경꾼들을 맞이하고 있는 모습이 다소 애처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북적대며 살아가고 있는 도시도, 천 년쯤 지나면 이런 모습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탄젤로 성은 로마 여행을 계획하기 전에는 몰랐던 성이다. Sant'Angelo가 영어로 하면 Saint Angel이고, 그래서 우리말로 '성천사 성'이라고도 부르는 모양이다. 로마의 황제가 자신과 가족의 무덤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피라미드나 천마총 같은 것은 무덤이라고 들으면 그런가 보다 싶은 모양인데, 성을 무덤이라고 하니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이름에 어울리게, 성 꼭대기에는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외양은, 함락시키기 어려울 것 같은 견고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무덤이라서 방어에 더 신경을 쓴 것인지 모르겠으나, 한때 교황청에서 성곽 및 요새로 사용했다고 하니, 성으로서의 기능도 충분했던 모양이다. 내부에는 여러 가지 전시물도 있었지만, 나는 건축물 자체가 더 흥미로웠다. 로마 제국이 세운 성을 구경하는 것이 처음이었고, 지금까지도 유일한 경험이다.
그 밖에, 구경했던 유적으로는 판테온과 대전차 경기장이 있다. 판테온은 로마 제국의 신전이다. 하지만,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로 가톨릭 성당으로 활용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그런지 신전의 느낌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외형만 신전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생각해보면 로마 제국 당시에도 신전 내부에 별다른 것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신의 동상 정도는 있었겠지만, 가톨릭에서 로마 신의 동상을 놔뒀을 리가 없다.
대전차 경기장은 사실 시설은 거의 없고 트랙을 알 수 있는 터만 남아있었다. 수십 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하는데, 과연 그 터만 보고도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경기장에서 보는 대전차 경기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스포츠가 존재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대전차 경기 정도면 도시 전체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인기 스포츠였을 것 같다.
유적지를 돌아다니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 몰랐다. 어쩌면, 그것이 로마 제국의 유적지여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책으로, 영화로, 여러 번 보고 상상했던 로마의 흔적 속을 부유하며 다니는 것은 무척 색다른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글을 쓰고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사진만 찍고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는데, 아마 다음번에 방문하면 글을 쓰고 있는 사람으로서 많은 영감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적의 한가운데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기분은 어떨지도 무척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