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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Apr 10. 2023

프로그래머의 '안 된다'는 말

2000년대 초반, 내가 주니어 프로그래머로 일을 하고 있던 시절에, 프로그래머들 사이에서는 기획자가 일을 가지고 왔을 때 함부로 '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돼도 안 되는 척, 쉬워도 어려운 척하는 것이 권장되었다. 한참 동안, 그런 일이 내가 몸 담았던 조직의 특수한 사례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유머를 보니, 프로그래머의 '안 된다'는 말이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프로그래머가 '안 된다'라고 말하는 것을, 잘 모르고 보면 일을 편하게 하려고 그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서는 그 반대에 가까웠다. 일이 너무 힘들어서 방어의 수단을 찾게 된 것이다. 당시에는 야근과 주말 근무가 흔했다. 그런데,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프로그래머였다. 사전에 정해진 프로세스에 따라 업무가 할당되고 일정이 정해졌는데, 기획자들은 늘 '꼭 해야 한다'면서 기존 업무에 새로운 업무를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들은 정시에 퇴근했고, 주말에 일하지 않았다. 심지어 나중에 그 일이 '꼭 해야 하는'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일을 끼워 넣어 처리되도록 만든 기획자가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안 된다'라고 말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일을 편하게 하거나, 자신의 부족한 역량을 숨기기 위해 '안 된다'라고 말하는 프로그래머를 목격한 적도 있다. 다만, 내가 목격한 그런 프로그래머들은 조직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다. 다른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같은 프로그래머들은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안 된다'는 말은 보편적 현상이더라도, 내가 예전에 겪었던 상황은 보편적 현상이 아닐 수 있다. 더구나, 20년쯤 지난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수 있다. 내가 굳이 '안 된다'는 말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이 정당하다 아니다를 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프로그래머들이 좀 더 현명하게 대처했으면 하는 생각에서다.


게임을 개발하는 입장에서, 기획자가 요구한 것 중에 구현이 불가능한 요구는 거의 없었다. 다만, 시간이 부족하거나 프로그램의 복잡도가 올라가는 경우들이 있었다. 먼저, 시간이 부족한 경우에 나는 기획자에게 시간 확보를 요청했다. 다른 업무로 일정이 꽉 차 있다면, 기획자가 다른 업무의 관련자들과 협의하여 우선순위를 조정해 주어야 했다. 기한 내에 완료가 불가능한 업무라면 기한을 변경하거나 업무 내용을 줄이는 것도 기획자가 해야 할 역할이었다. 어지간해서 프로그래머의 업무량을 늘려 해결하도록 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프로그래머가 일정을 과장하지 않는다는 믿음이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업무의 결과로 쌓을 수밖에 없다.


반면, 프로그램의 복잡도가 올라가는 것은 프로그래머가 해결해야 하는 일이다. 예외적인 상황이라는 것이 있지만, 대체로 프로그램의 복잡도 관리는 프로그래머가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는 일이었다. 특히,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만족스러운 경험을 제공하지 못하면 쉽게 폐기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기획적으로 필요한 내용을 구현하기 위해 프로그램이 복잡해지는 것은 기획자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프로그래머의 가장 직접적인 고객은 플레이어가 아니라 기획자이고, 고객의 다양한 요구사항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은 프로그래머가 해야 하는 일이다.


'중요하다'라고 말하는 것이 기획자의 습관일 수 있지만, 실제로 '중요한' 일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긴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게임을 출시한 직후 플레이어들의 반응이 생각과 다를 수 있다. 어느 정도는 기획자들이 예상하는 것도 있지만, 모든 상황을 미리 내다볼 수는 없다. 그리고, 게임의 성패가 갈리는 출시 직후에는 그런 상황에 민첩하게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프로그래머가 단순히 요구사항을 처리하는 것에 머무르지 말고,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제품과 서비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스스로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중요한 일을 적극적으로 처리할 때, 프로그래머의 가치와 평판은 올라간다. 프로그래머가 귀하다고 해도, 아무 프로그래머나 환영받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사실, 이 모든 것의 기저에는, 일정을 빠듯하게 주는 것을 선호하는 업계의 관행이 있다. 6개월 걸리는 일을 4개월 만에 해내는 것을 '성과'라고 믿는 잘못된 신념이 여러 가지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하지만, 일개 프로그래머가 그런 환경을 바꿀 수 있을 리는 없다. 어차피 그런 문제는 업계의 리더들이 생각을 바꾸지 않는 이상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좀 더 현실적인 차원에서, 해야 할 일과 아닌 일을 구분하고, 갈리지 않으면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하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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