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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Jun 16. 2023

20년 전의 보라카이

여행 갔던 도시의 사진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20년 전 보라카이의 사진이 들어있는 폴더를 발견했다. 세상 물정 잘 모르던 시기에 정신없이 결혼식을 해치우고 아내와 함께 갔던 신혼 여행지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뒤 몇 년 동안은 가끔 들춰봤던 것 같은데, 이후 십 년 넘게 컴퓨터 하드 디스크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도시는 아니지만, 정리하는 김에 같이 정리하다 보니 예전 생각이 조금씩 떠올랐다.


<쉼이 어울리는 섬>


'보라카이'라는 이름 자체를 요새는 거의 듣지 못하는 것 같다. 2000년대 초반에는 각광받는 신혼 여행지였는데 말이다.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해변 휴양지였고, 한국 사람들한테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섬이다. 다만, 가끔 태풍을 직격으로 맞아 큰 피해를 입기도 하는 섬이었던 것 같다.


<한국인 관광객이 제일 많다 보니, 작은 섬에 삼겹살 집도 있었다.>


한국 사람이 많이 찾다 보니, 한국인 가이드가 많았다. 그리고, 가이드들 중에 돈을 조금 모은 사람들은 아예 현지에 리조트를 차리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리조트가 꽤 있었다. 심지어, 섬에 소주와 삼겹살을 파는 식당도 있어서, 일행이었던 다른 한국인 신혼부부와 같이 소주를 즐기기도 했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는 전망대도 갔다.>


신혼여행을 가면 보통 신혼부부들을 한 팀으로 묶고, 전담 가이드가 섬에 있는 내내 일행을 데리고 다니는데, 당시 우리는 9월에 결혼해서 보라카이의 성수기가 막 지난 시점에 보라카이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래서, 팀에는 우리 부부와 다른 신혼부부 밖에 없었다. 일행이 단출하니, 일정에 융통성을 발휘하기도 편했고, 섬에도 여행자가 많지 않아 한산하게 보라카이를 즐길 수 있었다.


같이 다녔던 신혼부부는 지금도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남자가 사진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래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을 때, 우리가 찍어준 그들의 사진과 그들이 찍어준 우리 사진의 퀄리티가 많이 차이 났다. 당시에 그것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 봐도 그 사람이 찍어준 사진은 전문가의 사진 같은 느낌이 확 난다.


<지나다니면서 보는 바다가 참 좋았다.>


보라카이는 참 예뻤다. 섬도 예쁘고, 해변도 예쁘고, 바다도 예뻤다. 당시에는 그렇게 해변 휴양지로 신혼여행을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이후 지금까지 여행을 많이 했어도 한 번도 그런 섬 휴양지는 다시 가본 적이 없다. 아내가 보라카이로 가자고 해서 갔던 것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좋은 선택이었다.


보라카이에서 했던 것 중에 가장 좋았던 것은 스쿠버 다이빙이었다. 수영을 전혀 못하기 때문에 긴장을 많이 했는데, 전문가가 위에서 잡아주기 때문에 수영을 못해도 전혀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일단 물속에 들어가니, 그 풍경과 경험이 너무 신비로워서 긴장보다는 내내 즐겁기만 했다. 심지어 같이 간 일행들 중에 가장 오래 물속에 머무르기도 했다. 당시 물속에서 촬영한 것을 CD로 담아 주었는데, 살다가 어느 순간 유실되어 아쉽다.


<한국말로 '힘들다'를 연발하시던 그 분>


신혼여행에는 마닐라 일정도 있었다. 트랜스젠더 쇼를 본 것도 기억나고, 강에서 카누 같은 배를 탔던 것도 기억난다. 배에는 두 명의 노 젓는 사람이 있었는데, 팁을 많이 받으려고 무척 힘든 척을 했던 것이 기억난다. 가이드 말로는, 그렇게 하면 마음 약한 어르신들이 잘 모르고 큰돈을 팁으로 주기도 한다고 했던 것 같다. 환율 계산이 안 돼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줘 버리는 것이다. 그밖에 공원 같은 곳도 가고 했지만, 마닐라 일정은 사실 그렇게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평범한 풍경에도 마음이 가는 섬>


20년 전의 보라카이 사진을 보니, 아내와 둘이 여행을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자식이 생긴 이후로, 아이를 하나씩 데리고 여행을 간 적은 있어도 아내와 둘이 간 적은 없었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애들도 독립할 테니, 그때는 가장 먼저 아내를 데리고 여행부터 다녀야겠다. 보라카이를 다시 가보는 것도 좋겠지만, 서해, 남해, 동해의 해안을 따라 한 바퀴 돌아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물론, 아내가 같이 가줄 때의 이야기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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