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이라는 것은, 어떤 이슈에 대해 양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옵션을 발굴하고 선택하는 과정이다. 처음부터 적대적인 관계에서 시작되는 협상도 있지만, 좋은 관계와 좋은 의지를 가지고 시작하는 협상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좋은 분위기에서 시작한 협상조차도, 본질과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틀어지는 경우들이 발생한다. 이슈 자체가 처음부터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경우도 존재하지만, 양쪽이 충분히 합의를 이룰 수 있는데도, 과정의 문제로 인해 합의를 만들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협상에 임하는 당사자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닌 AI끼리 협상에 임한다면,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빠른 시간에 이루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AI가 아니다.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이고, 이성보다 감정에 더 잘 휘둘리는 존재이며,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강한 본능을 지닌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과 사람 간에 이루어지는 협상에서는,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방해하는 이런 특성들이 발현되지 않도록 조심할 필요가 있다.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게 만들면 안 되고, 양자에 이익이 되는 방안을 찾는 것보다 자신을 지키는 것을 우선시하게 만들면 안 된다. 이를 위해, 협상 과정에서 꼭 명심하고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는데, 이번 글에서는 그런 것들을 몇 가지 나열해 보고자 한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는 게임에서 패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패자가 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으면 사람은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가 강해진다. 그리고, 패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관념이 강해지면, 이제 누가 더 옳은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아이들의 말싸움에서 이런 면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아이들의 말싸움은 금방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형태로 진행되고는 하는데, 그 상태가 되면 누구의 말이 옳은가 보다 누가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가가 더 중요해진다. 그리고 상대방을 굴복시키기 위한 수단들이 동원되기 시작한다.
협상이 양자택일의 형태로 진행될수록, 한쪽은 승자가 되고, 한쪽은 패자가 되기 쉽다. 이런 상태에서 협상 당사자는, 좋은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협상에서 이겼다는 느낌을 받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 지나치게 공격적이 되거나 지나치게 방어적이 되기 쉽다. 이기기 위해 적절하지 않은 수단도 활용하게 된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거나, 혹은 합의에 이르더라도 관계에 좋지 않은 후유증을 남기게 된다.
협상은 양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옵션을 발굴하는 과정이다. 양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옵션을 찾아내면, 그 옵션에 합의하고 협상은 긍정적으로 마무리될 수 있다. 그런데, 양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옵션이, 협상을 시작할 때 양측이 들고 나온 옵션 중 하나라는 보장은 없다. 협상을 시작하기 전에는 상대방의 이해관계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아무래도 자기중심적으로 옵션을 가져오기 쉽다. 따라서, 협상에 양측이 들고 나온 옵션은 이슈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옵션 중 먼저 찾아본 일부분일 뿐이며, 더 좋은 옵션을 협상을 통해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면, 협상은 양자택일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좋은 옵션을 발굴하기 위한 협력 구도로 진행될 수 있을 것이다.
더 좋은 옵션을 발굴하는 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이 양측이 최초에 가지고 나온 옵션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결론이기 때문에, 그것은 더 이상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 옵션 자체가 어느 한쪽의 이익을 대변하는 옵션이 아니라, 양쪽이 함께 찾아낸 최선의 옵션이 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의 잘못된 행동을 바꾸고자 할 때, 그 사람을 공격하지 말고 행동을 공격하라는 말이 있다. 거짓말하는 아이의 행동을 고치고자 할 때, '거짓말하는 아이'를 바꾸려고 하지 말고, '아이의 거짓말하는 행동'을 고치려고 하라는 것이다.
데일 카네기는 '인간관계론'에서 '당신이 틀렸다'라는 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누군가 나를 공격한다는 느낌 자체가 사람을 방어적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어적인 상태에서는, 문제시되는 행동을 고치는 것에 저항하게 된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당신을 지지하지만 당신의 어떤 행동을 고쳤으면 좋겠다고 말한다면, 그 행동을 수정하는 것과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서로 다른 차원의 것이 된다.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에 오류가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 오류를 수정하는 과정을 더 잘 받아들이게 된다.
협상에 있어서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다고 언급하는 순간, 상대방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데 온 힘을 다하게 될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양자를 만족시킬 최선의 옵션을 발굴해 낼 수가 없다. 상대방은 이미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 하는 싸움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과 문제를 동일시하지 말고, 오히려 반대로 사람과 문제를 명시적으로 구분해 주는 것이 좋다. 상대방을 존중하지만, 어떤 문제가 나와 상대방 모두의 이익을 해치고 있다고 말해 주는 것이 좋다.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이, 자신을 비난하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을 더 이롭게 해 주기 위한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상대방은 자신의 입장을 지키기보다는 올바른 해결책을 찾는 데 더 집중하게 될 것이다.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조직에서 종종 목격하게 되는 상황이 있다. 어떤 중요한 문제를 두고 여러 사람이 회의에 참가한다. 문제의 원인에 대해 얘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여러 가지 제시한다. 그런데, 어떤 원인이나 어떤 방안에 대해 일부 참여자가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순간, 활발하게 진행되던 논의가 소강상태에 빠진다. 적극적으로 방안을 제시하던 사람도 말을 아끼게 된다. 그리고, 적당히 누구도 다칠 것 같지 않은 방안을 최종 선택하고, 좋은 회의였다고 자찬하며 회의를 종료한다.
관계는 중요하다. 협상은 좋은 옵션을 발굴하는 과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양측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양측의 관계가 앞으로의 협력에 계속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최상의 옵션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연속되는 의사결정의 질이, 치열한 경쟁 상황 속에서 내 조직의 위치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최상의 옵션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경쟁자보다 우위에 올라서기는 어렵다.
때로는 관계가 아니라 피로감 때문에 적절히 타협하기도 한다. 몇 시간의 토론 끝에도 좋은 해답을 찾지 못하면, 적당한 옵션을 선택하고 협상을 종료하고픈 유혹이 사람들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물론, 답이 나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차선책이라도 선택하고 진행시키는 것이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라고 인식하면서도, 소위 '머리 아픈' 과정에 대해서는 근성을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다. 심지어, 팀원들에게 근성을 강조하는 리더들이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들도 있다.
좋은 옵션이 발굴되지 않으면 일단 협상을 마치고 가까운 시기에 다시 만나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 다른 참가자를 추가로 초대할 수도 있고, 필요한 정보를 더 획득하고 협상을 이어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빨리 합의에 이르고 싶은 마음이나 관계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 때문에, 더 좋은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묻어버려서는 안 되겠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는 광고 카피가 있다. 필립스가 각종 생활용품을 판매하면서 쓰는 광고 문구다. 다른 제품에 비해 디테일한 부분까지 섬세하게 신경 썼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문구다. 그런데, 협상이야 말로 이 문구가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일에서는, 무시되기 쉬운 요소들 속에 오히려 중요한 것들이 담겨있을 수 있다. 사람은 이성적인 존재이고 싶어 하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감정에 더 크게 좌우되기 마련이다. 따라서, 감정에 영향받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려 하지 않으면, 중요한 일을 그르치게 될 수 있다.
반대로, 나의 감정과 상대방의 감정이 협상에 개입하는 것을 적절히 차단할 수 있다면, 협상은 충분히 이성적인 것이 되고, 모두에게 유익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1. 양자택일의 프레임을 경계하라.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형태가 되면, 사람은 자신을 방어하는 것을 첫 번째 목적으로 삼게 된다.
협상은 양자가 모두 만족할 수 있는 옵션을 찾는 과정이다.
같은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형태로 진행이 되면, 결론이 어느 한쪽의 제안과 일치하더라도, 다른 쪽이 패배감을 갖지 않을 수 있다.
2. 문제와 사람을 동일시하지 말라.
나를 공격한다는 느낌을 받으면 사람은 금방 방어적이 된다.
문제와 사람을 구별함으로써, 문제를 수정하는 과정이 사람에 대한 비난으로 느껴지지 않게 할 수 있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을 표현하면서, 명시적으로 문제와 사람을 구분해 주는 것이 좋다.
3. 적당히 타협하지 말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거나, 골치 아픈 일을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서,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고 끝내려는 경우가 있다.
당장의 마음은 편할 수 있어도, 최선의 선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해가 누적된다.
좋은 옵션이 발굴되지 않으면, 가까운 시기에 다시 협상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