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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취한하늘 May 24. 2024

운이 좋았다

우리 집은 재래시장 한 귀퉁이의 작은 구멍가게였다. 나는 그 구멍가게에 붙어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풍족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고생을 하지도 않았다. 형과 누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게 일을 도왔지만, 막내인 나는 힘든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집을 나서면 바로 시장이었다. 시장은 어른들의 세계였다. 욕을 많이 들었던 것 같고, 싸움도 많이 봤던 것 같다. 약장사도 기억나고, 굿판을 구경하던 기억도 있다. 저녁에는 우리 가게 앞에서 맥주를 마시는 아저씨들이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에 섞여 살아서일까? 욕을 일찍 배웠다. 내가 살면서 했던 가장 심한 욕은 모두 10살 이전에 했다. 게다가 내 인생 최초의 담배도 10살 이전에 피워봤다. 술은 13살이 최초의 기억인데, 아마 10살 이전에 마신 적이 있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나쁜 것을 많이 배웠지만, 그래서 그런 것에 대한 호기심이나 욕구가 오히려 크지 않았던 것 같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욕을 끊었다. 담배는 몇 번 피우다 말았다. 술도 20대까지만 많이 마셨다. 지금은 셋다 거의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생각도 거의 없다.


동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개입이 전혀 없는 세계였다. 그 안에서는 나를 보호해 주는 어른이 없었다. 오직 내 힘으로 내 자리를 찾아야 했다. 당연히 좋은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았다. 거짓말에 속아서 내 것을 빼앗긴 적도 있고, 몇 살 많은 형한테 꽤 오랜 기간 괴롭힘을 당한 적도 있었다. 아이들 돈을 빼앗는 불량한 형들도 여러 번 만났다. 그러면서 인간의 어두운 면을 많이 경험했던 것 같고, 내 힘으로 세상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의식도 점차 생겼던 것 같다.


형, 누나하고는 나이 차이가 조금 있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형, 누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쁘셨다. 나로서는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를 해줄 어른이 없었던 셈인데, 형, 누나가 걸어가는 길이 나에게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중학생일 때 형, 누나가 대학생이 되어서, 내가 몰랐던 세상의 일들을 형과 누나를 통해 많이 알게 되기도 했다. 민중가요라던가, 전태일의 이야기 같은 것도 중학생 때 배웠다.


어머니는 옛날 분이시다. 게다가 일찍부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장남에 대한 기대가 특히나 컸던 것 같다. 형에게 재능도 있었던 터라, 어머니는 형에게 많이 집중하셨다. 그 덕에 막내인 나는 어떤 면에서 방치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는 상당히 좋은 조건이 되었다. 학교 생활이나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 일도 없었고, 늘 남는 게 시간이었다. 돈이 없어서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런 것이 아쉽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 생각을 통제하는 사람이 없어서 자유로움을 많이 누렸던 것 같다. 그리고, 삶을 능동적으로 개척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 같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 사람이 많이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 살았으면 어땠을까,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계셨으면 어땠을까 상상해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저 생각을 해봤을 뿐, 크게 아쉬움을 느낀 적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런 환경과 조건들이 내가 '인간'으로서 성장하는데 모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풍족한 유년기를 보내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 적도 있다.


돌아보면 참 괜찮은 삶이었다. 늘 좋은 일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늘 나쁜 일만 있지도 않았다. 힘든 때가 있었지만, 내가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을 만큼의 어려움들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뿐만 아니라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모든 일들이 내가 살아가는 힘을 만들어 주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운이 좋은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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