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을 하면서 인상파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인상파의 그림을 실물로 보니, 사진으로는 느껴지지 않았던 감동이 밀려왔다. 그중에서도 특히 고흐의 그림이 마음에 많이 남았다. 왜 그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불안정한 느낌에 공감했을 수도 있고, 작품의 소재가 마음에 들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고흐의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고, 파리를 방문할 때마다 오르셰 미술관에서 고흐의 그림을 보았다.
고흐는 1853년에 네덜란드의 한 목사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화가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처음에는 화랑에서 일하면서 '화상'의 길을 걸었다. 그러다가, 노동자의 열악한 현실을 목격하고 성직의 길로 돌아선다. 하지만, 그 길도 생각대로 풀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결국, 성직의 길을 포기하고 비교적 늦은 나이인 27세에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고흐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가 37세이니,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사망할 때까지의 기간이 10년 정도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품들은 마지막 5년 동안에 그린 것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에서 고흐는 '비운의 천재'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맞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해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일단, 무명의 기간이 특별히 길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5년이면 충분히 감내할 정도의 기간이 아닌가 싶다. 지금의 아이돌이나 배우들과 비교해 봐도 그렇다.
그리고 특별히 가난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풍족하게 생활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한 수입이 없어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도록 동생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생활비 걱정 없이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지 않을까.
어쩌면 고흐의 '비운'은 건강하지 못했던 정신에 있었던 것 같다. 고흐는 어렸을 때부터 다소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고흐의 외부 환경은 화상으로도, 성직자로도, 혹은 화가로서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 만큼 괜찮았던 것 같다. 하지만, 불안정한 마음이 고흐를 괴롭히고, 편안한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것 같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림에 투영된 불안정한 마음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현대인들의 마음속에도 불안한 정서가 깔려있기 때문일까? 표출하지 못한 감정을 고흐의 그림을 통해 확인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것일까? 만약, 고흐가 안정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평안한 삶을 살았다면, 좋은 화가는 됐을지언정 지금만큼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그림은 그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고흐에게 가장 큰 행운은 동생 '테오'의 존재였을 것이다. 고흐에 대한 테오의 지원과 후원은 단순히 가족으로서의 책임감은 아니었던 것 같다. 테오는 고흐를 정말 사랑했던 것 같고, 자기 삶의 일부를 고흐를 위해 희생했던 것 같다. 형이 죽고 6개월 뒤에 따라 죽을 정도였으니, 테오에게 고흐가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테오가 고흐 옆에 나란히 누울 수 있게 된 것은 죽은 지 23년이 지나서인데, 그제야 테오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고흐는 권총으로 자살했지만 즉사한 것은 아니다. 총을 맞은 몸으로 1.6km에 달하는 거리를 걸어서 여관까지 왔다. 그리고 치료를 받다가 이틀 후에 죽는다.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고흐 자신이 치료를 거부했다는 말도 있지만, 그 사이에 의식은 충분히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자신이 곧 죽을 것은 알았을 텐데, 그때 고흐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봤을까? 테오가 받을 충격을 걱정했을까? 아니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들였을까? 어떤 마음이었을지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평화를 찾았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