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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by 취한하늘

‘날씨가 좋다’라고 하면 대부분 맑은 날씨를 떠올린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해가 보이는 날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맑은 날씨를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 나는 비가 오는 날씨도 무척 좋아한다. 비 오는 광경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빗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한다. 비 맞는 것도 좋아하고, 한때는 비가 막 갠 뒤의 상쾌한 공기를 가장 좋아하기도 했다.


비를 좋아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는데, 비와 함께 추억이 따라오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비와 관련된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에게도 비가 오면 생각나는 추억들이 있다.


가장 오래된 추억은 국민학교 때의 추억이다. 인천은 위치상 태풍의 영향을 받는 일이 적다. 그래도 가끔 큰 태풍이 오면 영향을 받기도 하는데, 그때가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바람이 심하게 불고, 비가 바람 때문에 옆으로 날리는 날이었다. 그날 나는 당번이었는데, 당번은 반에서 쓰는 걸레를 빨아야 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태풍 같은 것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었다. 그래서, 용감하게도 그 비바람을 맞으며 야외에서 걸레를 빨았다. 아마 지금 같았으면 난리가 날 일일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는 지금만큼 어린이를 보호하는 세상이 아니었다.(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는 그랬다.)


고등학교 때는 두 가지 추억이 있다. 남자 고등학생끼리는 우산이 없으면 그냥 비를 맞으면서 돌아다니기도 했는데, 그날도 그랬다. 친구들끼리 좋다고 비를 맞으며 거리를 활보했다. 그런데, 내가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다른 친구로부터 빌린 노트를 가방에 넣고 다녔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와서 보니 노트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음 날 그 친구에게 사과를 했고, 그 친구가 쿨하게 넘어가 주었지만,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미안한 일이었다.


또 한 가지 추억은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사실 그날 비는 별로 오지 않았다. 아침에 조금 오다 말았다. 그런데, 그 조금의 비 때문에 학교에서 진행하던 캠핑 프로그램이 취소되었다. 모든 학생들이 장비를 챙겨서 집결 장소에 모여있었다. 비는 아주 조금씩 내리고 있었고, 누가 봐도 금방 그칠 비였다. 하지만 학교는 캠핑 시작 직전에 계획을 취소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지만, 캠핑할 생각에 한껏 들떠있던 고등학생들에게는 무척 실망스러운 결정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친구 네 명이 한 친구의 집에 모였고, 이대로 헤어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갑작스럽게 청평행을 결정했다. 원래는 하룻밤 캠핑을 계획했지만, 어떤 이유였는지 당일로 다녀오게 되었다. 가서 특별히 한 것은 없다. 풍경을 잠깐 보고, 등목을 한 번씩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금방 집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나름대로 인상적인 여름날의 추억이 되었다.


결혼하기 직전의 추억으로 혼자 경주 불국사를 방문했던 일이 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이야기다. 혼자 경주 여행을 하는데, 하필 불국사 방문을 계획한 날에 비가 왔다. 그래도 폭우는 아니어서 계획대로 불국사를 방문했다. 그런데, 그것이 신의 한 수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방문객이 나밖에 없었다. 절에 거주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불국사 전체에 나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처마 밑에 앉아서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아무도 없는 고즈넉한 사찰에서 혼자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당시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마음이 아주 평화로웠던 것은 생각난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온갖 것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그때 이후로는 비 오는 절 풍경을 본 기억이 없는데, 지금도 경주를 방문하면 그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최근의 추억으로는 여행 중에 만난 비가 있다. 최근에는 아들과 둘이 여행을 많이 하는데, 대전에서 만난 비와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만난 비가 생각난다. 대전에서는 유명한 스테이크 집을 찾아가는데, 지하철역에서 꽤 걸어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런데, 걸어가는 도중에 비가 왔고, 우리는 우산이 없었다. 비가 많이 왔으면 아예 포기했을 텐데, 포기하기에는 애매한 양의 비가 내렸다. 결국 비를 맞으면서 식당까지 갔는데, 생각보다 가는 길이 멀었다. 어쨌든 식당에 도착했고, 우리는 맛있게 스테이크를 먹었을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아들과 유럽 여행 중에 피렌체에서 인터라켄으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밀라노를 거쳐 인터라켄으로 가면 되는데, 하필 선로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우회해서 가야 했다. 버스도 있었지만 둘 다 멀미를 하기 때문에 멀리 돌아가는 기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결국, 기차를 네 번 이용해서 약 8시간에 걸쳐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그런데, 인터라켄에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은 있었지만, 도시 간 이동하는 날이어서 짐이 많았다. 게다가, 배도 무척 고팠다. 결국, 비를 뚫고 맥도널드에 가서 햄버거를 먹었다. 그리고 1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숙소로 걸어갔다. 장거리 기차 여행에, 배는 고프고, 날은 어둡고, 비는 세차게 내리던 그날이, 당시에는 짜증도 나고 힘들었지만 지금은 아들과 웃으며 얘기하는 추억이 되었다.


몇 년 전부터 나는 가방에 우산을 넣어 놓고 다닌다. 일 년 내내 우산이 없는 적이 없다. 그래서 비 걱정을 별로 하지 않고 산다. 그런데 가끔은 비를 맞아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불쾌한 기분이 들어도, 일단 완전히 젖고 나면 비가 별로 거슬리지 않는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은 조금 의식된다. 그리고, 탈모를 걱정해야 하는 내 나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이제는 비 오는 풍경에 따뜻한 차 한잔 정도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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