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AI의 시대다. 지식 근로자가 하던 많은 일들을 AI가 대체해 나가고 있다. 아직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도, 기존에 비해 전문성의 장벽이 낮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기존에는 전문가가 해야 했던 것을 이제는 비전문가도 할 수 있게 바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획자가 갈고닦아야 할 역량들은 어떤 것일까?
단순히 숙련도가 필요한 일들은 AI가 점점 더 잘할 일들이다. 문서를 예쁘게 만들 수 있고, 정보를 꼼꼼히 관리할 수 있다. 따라서, 기획자는 좀 더 기획의 심층적인 부분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기획 문서를 잘 작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좋은 기획’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좋은 기획’이 ‘좋은 결과물’로 연결되도록 만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본질이 왜 중요할까? 콘텐츠의 형식, 사람들의 행동, 사회적 현상들은 무척 다양하다.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본질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큼 다양하지 않다. 게다가 시간이 흘러도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다양한 환경과 빠른 변화 속에서도 좋은 기획을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
예를 들어, ‘게임의 본질’을 생각해 보자. 게임을 ‘재미’와 연결시키는 사람이 많지만, 재미는 본질보다는 현상에 가깝다. 내가 생각하는 게임의 본질은 ‘목표 달성을 통한 성취감’이다. 사람은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고, 성취감을 주는 행동을 반복하려고 한다. 그리고 게임은 그러한 성취감을 쉽게 자주 느낄 수 있는 콘텐츠이다. 게임이 플레이되는 환경은 다양하고, 게임의 종류도 매우 많지만, 거의 대부분의 게임은 목표와 성취감의 구조를 이용해 플레이어를 확보한다.
본질을 잘 이해하면 영역의 경계를 넘는 것도 수월해진다. 게임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는 기획자는 다른 콘텐츠도 잘 기획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쇼핑몰 같은 서비스를 훌륭하게 기획할 수도 있다. 게임의 본질은 서비스의 본질과 닿아 있고, 경험과 소비의 본질과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획에 있어 근거는 매우 중요하다. 근거는 기획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를 주장할 때, 사람들은 그 주장의 근거를 확인한다. 근거를 믿을 수 있을 때, 사람들은 그 주장을 더 잘 받아들인다. 그런데, 기획도 일종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 기획이라면, ‘이렇게 만들면 사람들이 재미있어할 것이다’라는 주장이 될 수 있다. 당연히, 그 근거가 분명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AI도 근거를 제시한다. 그런데, AI가 제시하는 근거에는 허점이 있다. 그것은 AI의 동작 방식에 기인한다. AI는 귀납적 사고를 통해 결과를 만들어 낸다. 연역적 추론은 하지 못한다. 최근의 AI는 추론을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사람들의 추론을 귀납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리고, 연역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지 않은 근거에는 허점이 발생하기 쉽다. 남들이 이미 말한 근거를 종합하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새로운 상황이나 미묘한 상황에 대해 적절한 근거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따라서, 기획자 자신이 근거를 평가하고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것은 경력이 쌓일수록 더 중요한 것이다. 경력이 쌓일수록 선입견이 더 많아지고 강해지기 때문이다. 시니어 기획자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종종 그들의 선입견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게임은 이래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좋아한다’, ‘돈을 벌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진술들이 가득 들어있다. 그리고, 그 진술에서 쉽게 자유로워지지 못한다.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을 의심해 볼 수 있어야 한다. 선입견이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때로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내가 보기에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다른 사람의 의견이, 내가 모르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본질에 관한 관심’도 선입견의 속박에서 벗어나는데 도움이 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은 대체로 ‘표층적인 정보’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이해하고 있으면, 현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기존의 선입견과 전혀 달라 보이는 생각 속에서 동일한 본질을 발견해 낼 수도 있다.
시장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떤 시장들은 매우 빠르게 변화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게임 시장도 그런 시장에 속한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플레이어들의 기호와 요구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그런 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미 모든 기획자가 변화를 이해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경쟁력이 살아나지 않는다. 기획자로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이제 막 발생하기 시작한 변화를 더 민감하게 알아내거나, 혹은 앞으로 있을 변화를 미리 예측하는 것이 필요하다.
시장의 변화를 이해하려면 시장 자체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므로, 그 사람들의 마음을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 심리학이나 마케팅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는 않다.
사람들의 기호나 요구가 갑자기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하다가 어느 순간 눈에 띄게 된다. 그런데, 게임이라는 한 분야만 관찰하고 있어서는 그런 변화를 빠르게 감지하기 어렵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조차도 게임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영화도 보고, 스포츠 경기도 관람하며, 여러 가지 취미 생활을 즐긴다. 일도 하고, 사람들과 관계도 맺으며, 사회 현상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사람들의 그런 ‘생활’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해야, 사람들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빠르게 알아낼 수 있다. 따라서, 기획자는 자신의 기획 분야를 넘어서 더 넓은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AI도 트렌드를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AI가 예측하는 트렌드는 이미 많이 알려진 것일 가능성이 높다. 더 빨리, 더 정확히 트렌드를 예측하는 것은 스스로 트렌드를 파악하고 예측할 수 있는 기획자일 것이다.
기획자는 일을 발생시키는 사람이다. 그 일을 실현하는 것은 보통 다른 사람이다. 따라서, 실현하는 사람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하고 쓰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AI의 도움을 받으면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쓸 수 있다. 하지만, 기획자가 언제나 AI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회의에서 AI에게 대신 말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기획자는 단순히 기획 문서만 작성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게임 회사에서, 기획자는 일을 진행시키는 역할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된다. 이때 말이 명확하지 않으면, 오해와 왜곡이 발생하고 프로젝트에 낭비가 생길 수도 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고 쓰려면 역시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어려운 주제나 추상적인 주제를 글로 설명해 보자. 쉬운 주제를 쉽게 설명하는 것은 훈련이 되지 않는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풀어내는 연습을 해야 역량이 쌓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작성한 글을 스스로 회고해 보고 타인에게도 검토를 요청해 보자. 이런 과정을 반복하면 점차 쉽게 말하고 쓰는 요령이 터득되고,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쉽게 말하고 쓰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AI가 글을 쓴다. AI가 그림을 그린다. 음악도 만들고, 심지어 프로그래밍도 한다. 단순한 작업은 AI가 하면 된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 사람은 기획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디렉팅도 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획자뿐만 아니라, 디자이너, 작곡가, 프로그래머들도 기획을 하고 디렉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을 기획하고, 음악을 디렉팅 하고, 프로그램을 설계해야 한다. 그래서, AI가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도록, 혹은 AI를 이용한 작업이 큰 가치를 만들어 내도록 이끌어야 한다.
AI가 발전하면서 ‘스킬의 시대’는 저물고 있다. 이제는 ‘기획의 시대’, ‘디렉팅의 시대’이다. 지금까지는 기획을 남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더라도, 앞으로는 본인의 영역에서 기획에 관심을 갖고 직접 시도해 보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1. 본질을 파악하기
현상을 빠르게 변화하지만 본질은 빠르게 변화하지 않는다.
서로 달라 보이는 영역들도 본질은 비슷할 수 있다.
2. 근거를 탐색하고 확보하기
근거는 기획을 신뢰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방하는 AI로는 충분한 근거를 만들지 못할 때가 있다.
3.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경력이 쌓일수록 선입견에 사로잡히기 쉽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본질에 관심을 갖는 태도는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데 도움이 된다.
4. 트렌드를 파악하고 예측하기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에서는 변화를 빠르게 파악하거나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장을 구성하는 사람들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게임 같은 특정 영역에 국한하지 말고, 사람들의 생활 전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5. 이해하기 쉽게 말하고 쓰기
기획을 실현하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하고 쓸 수 있어야 한다.
AI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도 가능해야 한다.
어려운 주제를 쉽게 설명하는 연습을 반복하면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