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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라이클리너 Oct 25. 2022

제조업계를 타깃으로 하는 B2B 스타트업은 개발자로 일하기에 쉬운 곳은 아니다. 우리의 주 고객사들은 검사 장비 업체라서 그들의 하드웨어를 중심으로 일이 돌아가며 소프트웨어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듯하다. 철 지난 윈도우 7 운영체제를 여전히 사용 중이라 우리 제품이 잘 호환되지 않는다거나, 고객사에서 우리 제품을 사용하는 시나리오가 예측에서 벗어난다거나 하는 상황에 종종 부닥친다. 


실제 검사 장비가 사용되는 현장들이 대부분 보안을 위해 인터넷 연결이 안 된다는 점도 큰 장벽이다. 언제나 오프라인 상황을 가정하고 제품을 준비하여 배포해야 하며, 문제 해결을 위해 현장에 나가더라도 신속하게 대응하기가 어렵다.


이런 문제들은 해결하려면 해결할 수야 있지만 우리 손으로 해결이 어려운 경우에는 상당히 난처해진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개발에 사용한 서드파티3rd party 라이브러리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해당 라이브러리의 내부 구현을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일이 커지게 된다.


하지만 고객의 만족을 위해서라면 문제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집요하게 문제를 풀어야 한다. 실제로 언제나 그런 각오로 일을 해 왔고 문제가 터질 때마다 모두가 힘을 합쳐 해결책을 찾아냈다. 문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어떻게든 극복 가능한 영역일지도 모른다.



극복이 어려워 보이는 영역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이 일에서 어떻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지였다. 예전부터 크게든 작게든 이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나는 보람을 느끼고 일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지금도 나는 내 손길이 닿은 제품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실감하고 싶다.


아쉽게도 이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품 사용과 관련해 주로 연락을 주고받는 장비 업체들은 많아야 열 곳 남짓인 데다가 그나마도 연락이 오는 건 장애가 터져 불편함을 호소할 때다. 문제가 자꾸 발생하고 대응이 늦어지면 우리 제품 사용을 재고할 수도 있다는 냉정한 반응이 돌아오기도 한다. 


비즈니스의 세계가 다 이렇지 어쩔 수 없다. 고객사도 그들의 업무와 일정이 다 정해져 있고 우리 때문에 그 계획이 틀어져서는 안 된다. 우리를 계속 다그쳐서 문제를 해결하게 하고, 정말로 아니다 싶으면 손절하는 수밖에 없을 테다. 우리 제품이 유용하다거나 만족스럽다는 반응을 따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내가 얼마나 보람을 느끼는지보다 당장 고객사가 원하는 기능을 제공해 주는 게 당연히 최우선이다.



그간 B2B 소프트웨어만을 개발하며 느낀 결핍은 뜻밖에도 우리 가게에서 채워졌다. 서비스직은 본질적으로 나를 낮추어 고객에게 만족감을 선사해야 하는 일이다. 내가 일을 똑바로 한다면 고객은 만족감을 드러낼 것이고 고객이 표현한 만족감에 나도 보람을 느낄 것이다. 가게에서는 고객을 직접 대면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반응을 곧바로 확인할 수도 있다.


특히 우리 가게는 8인석 바 테이블 하나만 있는 작은 가게이다 보니 손님의 반응을 확인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다. 손님이 와인이나 음식 맛에 만족하는지 아닌지를 곧바로 눈과 귀로 확인 가능한 구조다. 함께 온 사람들끼리 하하호호 웃으며 가게 이곳저곳을 사진에 담는 것만 봐도 우리 가게의 분위기가 잘 먹혔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그럴 때마다 카메라를 피해 움직여야 하지만). 먼저 표현을 하지 않는 손님들과는 여차하면 직접 이야기를 나누면서 반응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


일단 아내가 매일 굽는 빵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백이면 백 다 맛있다며 연신 감탄을 쏟아낸다. 나름 빵돌이, 빵순이를 자부하는 손님들도 전부 이 맛을 인정했다. ‘빵 한 접시’에 나가는 빵 세 종류는 정말 거를 게 없이 다 맛있고, 빵에 발라 먹는 스프레드가 네 종류 준비되기 때문에 넷 다 취향에 안 맞지 않는 이상 실망할 리 없다. 


바게트로 만드는 샌드위치 또한 맛이 보장되는 메뉴다. 애초에 빵이 훌륭한 데다가 안에 햄, 치즈, 채소, 잼을 적절히 잘 섞어 놔서 다채로운 맛을 즐기기 좋다. 치즈 케이크 이야기도 빠트릴 수 없다. 유독 치즈 케이크에 관해서는 “원래 치즈 케이크를 잘 안 먹는데 여기 치즈 케이크는 먹는다.”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음식을 제공하는 입장에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 아닌가 싶다. 그 외에 토마토나 무화과 등 과일 베이스의 메뉴들도 팬이 많다. 전부 아내의 공이지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덩달아 어깨가 으쓱해진다.


한편 가게에 와인 종류가 다양하다 보니 손님이 와인을 직접 고르기보다는 이들의 취향에 맞게 추천을 해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단 맛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신 맛은 어느 정도가 좋은지, 가벼운 게 좋은지 묵직한 게 좋은지 등등 손님이 원하는 느낌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후보를 두세 병 추린 뒤 손님에게 고르도록 한다. 와인바를 운영한다면 당연히 와인 추천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가게에 있는 와인을 거의 다 맛보고 특징을 정리해 두어야 하니 마냥 쉬운 일은 아니다. 취향에 맞게 두세 병을 선택한 뒤 이를 손님에게 적절하게 설명해 주는 것도 여전히 까다롭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와 아내의 추천이 성공해서 손님이 와인을 마음에 들어 할 때의 뿌듯함은 그 어려움을 모두 잊게 해 준다.


나아가 우리가 의도한 가게의 콘셉트나 분위기를 잘 알아주고 그대로 즐기는 손님을 볼 때면 더욱 반갑다. 역시 와인에는 빵이랑 치즈만 곁들여도 충분하다며 좋아하는 손님도 있고 와인에 빵이 이렇게 잘 어울릴 줄 몰랐다며 좋아하는 손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우리에게 힘이 되는 리액션이다. 


한번은 와인과 음식뿐만 아니라 우리 가게의 전반적인 톤, 심지어 의자의 높이까지 완벽하다며 칭찬과 응원을 받은 적이 있었다. 목재와 조명의 톤, 바 테이블과 의자의 높이 모두 개업 전 꼼꼼히 따져 본 요소들이었다. 역시 맛집을 자주 찾아다니는 사람들의 안목은 예리하구나 싶었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주도한 작업에서 좋은 반응이 돌아올 때 더욱 기분이 좋긴 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손님이 노션 와인 페이지를 활용하여 와인을 고를 때, 월간 없음악을 잘 읽고 듣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 줄 때, 가게에서 나오는 음악이 좋다고 해 줄 때가 있겠다. 아내와 같이 가게를 열지 않았더라면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작업들이었다. 두 가지 일을 병행하면서 고될 때도 있지만 나로 인해 세상이 조금은 더 나아졌다는 생각에 즐거움이 더 크다. 이전 글에서는 마치 남들이 하지 않는 걸 할 때에만 기뻐하는 사람인 듯 굴었지만 이렇게도 기뻐하면서 산다(머쓱).



물론 손님들이 우리 부부의 면전에 대고 혹평을 할 리가 없다. 웬만큼 까다로운 사람이 아닌 이상 불만족이 있더라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삼키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니 가게에서 직접 보고 듣는 반응은 어느 정도 보정이 되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어쩌면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 속 평가들이 더 정확하고 중요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지도 앱 리뷰나 블로그 리뷰 모두 선방하고 있다…라고 하기에는 리뷰 개수가 그리 많지도 않고 그마저도 지인들이 응원차 남겨 준 리뷰들이 섞여 있어 민망하다. 특히 N사 지도 앱의 별점이 5점을 달리고 있는데, 우리 가게가 생기고 얼마 뒤 별점 제도가 폐지되면서 기존에 받아 놓은 점수가 운 좋게 그대로 박제되었을 뿐이다. 표본이 늘어날수록 점수는 당연히 더 낮아졌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터넷에서까지 리뷰를 남기지 않았다. 나만 해도 다른 식당에 다녀와서 정성스럽게 별점과 리뷰를 남기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러면서 우리 가게에 리뷰가 많이 달리기를 바란다면 그건 너무 도둑놈 심보다.



내가 바라는 다음 단계는 우리의 영향력을 더 키우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세상에 기여하는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크게 크게 기여하는 게 당연히 보람이 클 것이다. 우리 가게를 방문해 주는 사람들이 대체로 만족한다는 건 알았으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만족감을 느끼고 표현해 주었으면 좋겠다.


욕심은 그러한데 현실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다. 가게의 규모가 작은 덕분에 손님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기에 좋았으나 가게의 규모가 작은 탓에 확장성이 부족하다는 한계도 뚜렷하다. 더군다나 주변 상권과 우리 가게의 입지, 시시각각 변하는 트렌드, 거시적인 경제 상황, 심지어 느닷없이 유행하는 전염병 등 손님의 수를 결정하는 변수는 상당히 많고 예측하기도 어렵다. 이미 ‘핫플’의 지위에 올라 잘나가는 곳이라면 코로나가 창궐하든 경제가 휘청이든 굳건할 수 있겠지만 우리 가게는 동네 구멍가게에 가까워 바람 앞의 등불 신세를 면치 못한다.


일희일비하지 말자고 항상 되뇌지만 손님이 뜸해 가게가 조용한 날이면 어쩔 수 없이 기분이 가라앉는다. SNS 팔로워 수가 잘 늘지 않고 정체될 때면 또 얼마나 답답한지 모른다. 회사에서는 느끼지 못할 보람이 있는 만큼 회사에서라면 굳이 겪지 않았을 괴로움도 존재하는 셈이다. 이러다 손님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이 맛에 가게 하는 거 아니겠냐며 다시 ‘뽕’을 채운다. 어느새 나는 꽤 일희일비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가게에서는 느낄 수 없는 보람이 회사에 있을 텐데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내 일의 가치와 영향력을 굳이 내가 나서서 깎아내릴 필요는 없는데도 말이다. 고객사가 아무리 몇 안 되고 불만 투성이라 한들 우리 회사에 돈을 지불하고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가 만족도가 높다는 뜻일 테다. 게다가 우리의 고객사 중에는 누구나 알 정도로 글로벌한 대기업도 있다. 그러니 대기업의 영향력에 슬쩍 편승하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를테면 내가 개발한 제품이 배터리 공장에서 불량을 잘 잡아내어 생산성과 품질을 모두 높였다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저렴하고 안전하게 전기차를 이용한다고 믿어 보자는 말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나쁘지 않은 보람 아닐까. ‘정신 승리’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이렇게라도 회사 다닐 맛을 또 찾아내 보는 거다. 어떻게든 적당히 ‘뽕’ 채우면서 살아야겠다. 그래야 길게 보고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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